듀나 자, 아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신발을 벗고... 네, 맨발이에요. 얼마나 발이 시려웠겠어요. 늦가을이라 날도 춥고 얼음장같은 물에 담그고 있었는데다가 온돌 바닥인 것도 아니니. 예술이 뭔지...

파프리카 그래도 이 장면부터는 양수리 세트죠? 배우들 발 시려운 건 마찬가지였겠지만요. 메이킹 필름에서 헬로 키티 슬리퍼를 신고 있던 배우들 모습이 기억나네요.

듀나 드디어 은주가 등장합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컴컴한 복도에서 유령처럼 튀어나오는 거예요. 마치 어둠 속에서 비물질적인 어떤 존재가 서서히 결정화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파프리카 이 장면에서 염정아는 은주를 아주 극단적인 캐리커처로 연기하고 있어요. 인공적이고 가식적이고 너무나도 가짜같아요. 어떤 영화관에서건 관객들은 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웃음을 터뜨릴 거예요. 그리고 그건 정확한 연기에 대한 정확한 반응이기도 해요. 단지 전 이 점이 궁금하답니다. 과연 관객들은 자기네들이 웃을 때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듀나 전 그 웃음의 종류가 과연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궁금하군요.

파프리카 처음 수연은 언니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인식됩니다. 은주가 수연에게 말하는군요. "건강해져서 너무 기뻐." 그 다음에 수미보고 말하네요. "너도 나아진 거지?"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요? 이들은 모두 엄마와 수연의 죽음은 까맣게 잊고 있어요. 다들 수미와 수연이 아파서 병원이나 요양원에 머물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수미는 은주가 수연을 몰래 학대하는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겠지요? 그럼 은주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듀나 은주는 아직 탄생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수미는 자신의 편견과 기억을 이용해서 막 은주를 만들었지요. 수미에게 은주는 '못된 새엄마'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새엄마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수미는 [장화홍련전]과 같은 못된 계모 이야기를 텍스트로 삼아 환상을 진행시키는 것이지요. 당연히 이런 스테레오타입들은 복잡한 생각도 못하고 자의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수미가 은주의 역할에 조금씩 깊이있게 빠져드는 동안 수미의 은주는 서서히 수미가 가지고 있던 인간성과 인간적 감정에 오염되고 맙니다.

파프리카 특별 요리? 은주가 아이들을 위해 특별 요리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네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듀나 아, 전에 있었던 [장화, 홍련] 팬 미팅 때 비슷한 질문이 날아왔어요. 저도 인터넷에서 당시 찍은 동영상 파일을 다운받아 봤는데, 김지운은 출장요리사가 가져온 요리를 수미가 연기하는 은주가 식탁 위에 올려놓기만 한 거라는군요!

파프리카 좋은 대답은 아니네요. 수미처럼 정신이 똑바르지 못한 사람이 해낼 수 있을만한 행동이 아니에요. 나중에 지어낸 변명처럼 들리는데요?

듀나 또 알아요? 수미가 혼자 쇼를 하는 동안 아빠가 열심히 만들었는지.

쓸데없는 잡담이 흘러가는 동안 수미가 자기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수연은 옆에 없고요. 김지운은 수연의 수상쩍은 부재가 진상을 암시하는 힌트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그게 원래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최종편집의 결과였을 거예요. 이 뒤로 이어지는 장면 하나가 삭제되었으니까요. 그 장면에선 수연이 자기 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수미가 그 쪽으로 달려가지요.

전 그 잘린 장면이 아쉬워요. 이 장면이 삭제된 건 옷장이 너무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사실 좀 그러면 어때요? 이미 다중인격과 같은 노골적인 힌트도 공개적으로 주었잖아요. 옷장이 보였다고 해서 "아, 저 안에서 미친 여자가 독약먹고 목을 매 자살했고 불쌍한 딸 아이가 깔려죽었구나!"라고 짐작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이렇게 옷장의 존재를 부각시키면 오히려 영화의 균형이 더 잘 잡히지 않겠어요?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옷장을 집어던지는 것보다요.

파프리카 수미가 커튼을 연 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잘래잘래 흔듭니다. 이 동작은 동생 수연의 잘래잘래 동작과 비슷해요.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모르겠군요. 의도적이라면 이 역시 흥미로운 힌트일 겁니다.

그리고 수미는 12시 45분에 정지되어있던 시계를 2시 34분으로 고치고 추를 움직여 시계를 살립니다. 12시 45분은 수연이 옷장에 깔린 바로 그 시각이에요. 나중에 에필로그를 보면 수미의 시계가 그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 게 보이지요.

수미는 책상에서 자기가 가져온 것과 똑같은 일기장과 노트를 발견합니다. 벽장 안에는 같은 옷들이 수십 벌 걸려있고요. 김지운 말에 따르면 이건 반복의 상징입니다. 수미가 끝없이 반복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악몽의 상징요.

슬슬 불평이 나옵니다. 네, 상징을 사용하는 걸 말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수많은 상징들은 그냥 상징들입니다. 전 추리소설처럼 완벽한 해답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상징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상징적 의미가 제거된 뒤에도 거기 있을 다른 이유가 있어야지요. 아무리 이 모든 것들이 위태로운 정신의 한 소녀가 만들어낸 악몽이라도 해도요. 이런 식으로 상징들만 툭 던져놓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

듀나 그래도 그 뒤에 나오는 장면은 핑계가 있지요. 은주는 내의를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미 똑같은 내의가 놓여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같은 모양의 내의들은 수미가 본 똑같은 옷들과 같아 보이지만 더 논리적입니다. 수미가 딸로서 한 번 가지고 왔다가 나중에 아내인 은주로서 다시 한 번 가지고 왔다고 하면 되니까요.

파프리카 하지만 은주는 위에서 내려오잖아요. 2층에 올라간 적도 없었던 은주가 위에서 내려온다는 게 다중인격의 힌트 중 하나가 아니었나요? 수미가 내의를 가지고 왔다면 다시 올라가서 은주가 되어 또 내의를 들고 내려왔다는 말이니 힌트가 힘이 없어지는데.

듀나 아마 빨래한 내의들이 다 위층에 있었나 보죠... 아니, 그것도 이상하네. 대부분 빨래는 세탁기와 빨래줄이 있는 아래층에 있기 마련 아닌가요? 그렇다고 아빠 내의가 애들 옷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고. 2층엔 애들방밖에 없잖아요. 아니, 전체적으로 이상해요. 은주는 안방 침대에서 내의인지 잠옷인지를 찾아들고 또 복도로 나가잖아요. 도대체 이 집에서는 내의를 어디다 놓는 건데요?

파프리카 무현이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상대방은 다른 데에 머물고 있는 진짜 은주입니다. "선규랑 선규처가 오기로 했어."라고 말하네요. 선규는 진짜 은주의 동생이지요.

듀나 은주와 무현의 관계가 생각외로 복잡한 것 같지 않아요? 수연과 엄마가 죽던 날 둘은 부부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날 선규와 미희는 무현의 집에 있었던 걸까요? 원래부터 이 세 사람이 무현의 가족과 아는 사이였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가 맞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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