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드디어 살벌한 저녁 식사시간입니다. 은주, 수미, 수연 모두가 무현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지만 실제로 이 방에 존재하는 사람은 무현과 은주 흉내를 내는 수미뿐입니다.

듀나 여기서 은주는 선규와 선규처가 온다고 무현에게 알립니다. '부부'의 첫번째 대화지요. 전 한국 영화를 볼 때마다 부부간의 대화가 얼마나 평등한지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장면에선 은주가 무현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습니다. 왜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아요. 원래 직장 선배였을 거고 중간엔 한 동안 고용주였으며 나이도 훨씬 많으니까요. 하지만 중반 이후에 이 관계가 갑자기 바뀌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그 때 다시 한 번 다루기로 하죠.

하여간 은주와 수미의 첫번째 신경전이 시작됩니다. 핑계는 내의와 수미의 똑같은 옷들이고요. 이 말싸움은 모두 무현이 없을 때만 진행됩니다. 마치 부모 몰래 서로에게 시비를 거는 자매 같아요. 이들을 수연이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이 표정 연기에 대한 문근영의 명답: "밥 먹는 데 자꾸 시끄럽게 굴잖아요.")

파프리카 무현이 은주 역할을 하는 수미에게 알약을 주는군요. 세 명 중 진짜 수미가 은주라는 증거입니다.

듀나 수미는 음식을 남겨둔 채 식당을 떠나고 계모의 눈초리에 겁먹은 수연은 언니를 따라갑니다. 이 장면은 에필로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의 보다 얌전한 재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수연은 계단에 앉아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미를 만납니다. 역시 에필로그에 일어난 사건을 재현하면서 수미가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에필로그 때와는 달리 수미는 수연 옆에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김기영의 [하녀]지요. 이 영화의 계단은 은근히 [하녀]에 나오는 계단의 좌우가 바뀐 거울상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하녀]와 [장화, 홍련]의 유사성을 검토해봐도 재미있을 거예요. 모두 아내의 자리를 밀어낸 새 여자와 무능하고 힘없는 남편, 그리고 그 여자를 증오하는 두 아이의 이야기지요. 아이들 중 어린 쪽이 사고로 죽는 것도 같고요.

언젠가 어떤 영어 게시판에서 이런 질문을 읽은 적 있어요. 한국 영화에서 계단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느냐고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마의 계단]과 [하녀]를 연달아본 관객이라면 당연히 한 번 해볼만한 질문이 아닌가요?

물론 한국 영화에서 계단이 특별한 보편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계단은 서구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집 안에 계단이 있다는 말은 그 집이 이층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층집에서 산다는 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와 성공의 상징이었으며 서구적 근대화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였지요. 김기영의 [하녀]에서 계단과 이층집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장화, 홍련]에서 계단은 2층의 아이들 세계와 1층의 어른들 세계를 연결하고 차단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일제시대가 집에 남긴 희미한 역사적 흔적을 제외하면(물론 이를 영화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부장제의 질서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건 보는 사람 맘이지만) 어떤 사회적 의미도 없지요. 여기서 이층집은 그냥 당연한 구조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인 집은 굉장히 추상적인 공간입니다. [조용한 가족]의 산장은 고립된 곳이었지만 그래도 산에서 내려가면 익숙한 마을이나 도시가 나올 법한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화, 홍련]의 집에서는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쪽으로 달려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것 같아요. 그만큼이나 비현실적이지요.

이런 비현실성은 영화에 맞습니다. [장화, 홍련]은 물리적인 실제 세계에 대한 영화가 아니에요. 이 영화의 집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한 소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세계예요. 집이 진짜 세계로부터 격리되고 추상화되면 될수록 이 영화의 주제와 더 잘 어울게 되지요.

파프리카 또 수연이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드네요. 이건 문근영 버릇인가? 아니면 감독이 귀여우니 한 번 더 해보라고 시킨 걸까요?

듀나 "그 여자가 뭐라 그러면 나한테 말해. 전에처럼 그러지 말구"라고 수미가 말하고 있군요. 물론 수미는 은주가 수연이를 괴롭혔던 삭제된 에필로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제된 장면이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조금 어긋나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빼니까 빈 구멍이 조금 크게 보이는군요. 나중에 나오는 싱크대 유령 장면도, 팔의 상처도 설명이 안되고요.

파프리카 은주의 새장이 등장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것도 조금 미심쩍어요. 은주가 그렇게 아끼는 새들이라면 자기가 갈 때 가지고 갔지, 이런 식으로 집에 방치해두지는 않았을 거예요. 게다가 한동안 아빠도, 애들도 없이 집이 비어있었던 것 같지 않나요?

듀나 캠코더를 든 무현이 은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무현은 은주처럼 행동하는 수미를 몰래 찍을 계획이지요. 후반부의 설명 장면이 떨어져나간 통에 이 장면은 의미가 없어져버렸지만요.

자, 이 장면에서 무현은 정말 난처합니다. 과년한 딸이 아내 행세를 하며 자기 침대에 들어오니까요. 어떻게든 받아주긴 해야 할텐데 그것도 정도가 있죠. 결국 딸이 잠들자 무현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달아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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