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드디어 영화가 호러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집 안에서 다닥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은주가 깨어납니다. 그와 함께 수연도 자기 침대에서 깨어나고요. 근데 이 장면의 DVD 화면은 너무 어둡군요. 문근영의 표정 연기가 거의 보이지 않아요. 텔레비전에서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수연의 문이 열립니다... 누구 손인가요? 누가 들어오는 거지요? 수미? 은주? 아니면 집 안 어딘가에 숨어있는 유령? 지금 수미는 누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요?

듀나 일단 수미가 아빠 침대에서 은주로 깨어났죠. 그와 동시에 수연이 깨어났다는 건 은주가 수연의 인격으로 서서히 전환되었다는 걸 뜻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겁에 질린 수연이 수미의 침대로 숨어드는 순간 수미는 다시 수미가 되는 거죠. 다닥거리는 발소리는? 이 영화에서는 그런 디테일에까지 논리를 따질 순 없어요! 환청일 수도 있고, 진짜 유령일 수도 있고, 자기 발자국 소리일 수도 있고. 마음대로 고르시길.

파프리카 수미의 이불 밑에서 수연의 얼굴이 올라옵니다. "옷장 때문에 그래?"라고 수미가 묻습니다. 공식적으로 옷장이 언급되는 첫번째 장면이지요. 또다시 등장하는 수연의 고개 잘래잘래 흔들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누가 내 방에 있다가 나갔어"라고 수연이 말하는군요.

듀나 동생을 보듬어준 수미는 천천히 아래층, 즉 적진으로 내려갑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네요. 방송이 끊어진 채 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은 이제 거의 공포영화의 클리셰가 되어 가는 것 같지 않나요?

서재에서 수미는 잠자고 있는 아빠를 발견합니다. 이불을 덮어주던 수미는 은주와 마주칩니다. 둘의 두번째 결투지만 아직도 이들의 태도는 비교적 예의바르군요. 하긴 둘 다 지치고 졸릴 때니까요.

그러나 슬슬 이들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무현은 서로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물건이지요. 여기서 그들이 무현에게 품고 있는 감정 자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이 장면에서 둘은 고기 덩어리를 가운데 두고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같습니다. 이 장면의 구도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그대로 반복되기도 하죠.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는 수미의 동작을 보며, 우린 엘렉트라 컴플렉스에 대해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장화, 홍련] 팬들은 근친상간과 관련된 말만 나와도 질겁을 하지요. 아무래도 그네들은 수미라는 캐릭터의 '순수성'을 깨트리는 모든 해석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합니다.

수미와 무현이 정말로 근친상간적인 관계였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아귀도 맞지 않거든요.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필요 이상으로 건드리는 것도 영화를 기계적으로 오도하는 것이 될 겁니다. 이 영화가 집중하고 있고 관객들도 집중해야 하는 건 무현을 둘러싼 수미와 은주의 관계가 아니라 수연을 둘러싼 수미와 은주의 관계거든요. 이 영화에서 가부장적 제도는 원작 [장화홍련전]보다 비교적 덜 중요합니다. 엘렉트라 컴플렉스에 지나치게 매달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 있고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텍스트를 놓치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관객들과 영화의 교류를 독단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화, 홍련]은 유달리 여성 관객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그들에게 중요했던 건 엘렉트라 컴플렉스가 아니라 수연에 대한 수미의 애정과 동생을 구하지 못한 죄의식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 이야기에 깔려있는 근친상간 서브텍스트를 완전히 부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서브텍스트가 세 여자들의 적대적인 관계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갈등에 은밀한 통주저음을 깔아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은주를 떠난 수미는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따고 물을 마십니다. 벌컥벌컥 열심히 마시지만 정작 물은 얼마 없어지지 않았네요. 직접 물을 마신 임수정 당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미스터리랍니다.

수미는 냉장고 안에서 종이에 싸인 생선 내장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건 구체적인 단서 같은 건 아닙니다. 은주와 집에 불길함과 기분나쁜 느낌을 부여하기 도구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이 장면은 [갈가마귀 키우기] 닮지 않았어요? 밤에 아래층으로 내려온 아나가 냉장고에서 닭발들을 발견하는 장면 말이에요.

파프리카 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그러고 보면 수미가 수연을 위로하는 장면도 아나가 죽은 엄마와 함께 있는 장면과 비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듀나 그것 뿐만이 아니에요. [갈가마귀 키우기]는, 자주 비교 대상이 되는 [링]이나 [식스 센스]같은 영화들보다 훨씬 [장화, 홍련]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모두 엄마를 잃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유령 이야기이며,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며, 죄의식에 대한 이야기지요. 암만 생각해도 김지운이 [장화, 홍련]을 만들기 전에 이 영화를 봤던 것 같습니다. 몇몇 유사성은 정말 우연같지가 않거든요. 수미가 엄마의 유품을 찾아내는 창고나, 수미가 계모를 독살하려다가 오히려 자기에게 독을 먹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삭제된 스토리 라인은 정말 [갈가마귀 키우기]의 인용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수미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갑니다. 이제 수미는 동생 수연을 꼭 끌어 안고 있어요. ("괜찮아, 언니가 있잖아." "언니가 네 옆에 있을게.") 무척 예쁘고 포근하며 순진무구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장면이지요. 배우들이나 감독도 결과나 작업 과정에 아주 만족하는 모양이고요. 임수정은 이 때부터 문근영에게 거의 동생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하죠?

파프리카 수미와 무현의 근친상간 서브텍스트에 질겁하는 사람들도 수미와 수연 사이의 동성애 서브텍스트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둘다 근친상간이라는 점은 다를 게 없는데 말이에요!

듀나 수미와 무현은 수미와 수연만큼 그림이 나오지 않거든요! :-P

사실 다른 이유가 있죠. 드러난 텍스트로서 두 자매의 근친상간을 받아들이기엔 수연이 너무 어려보이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적인 느낌이 줄어드니 비교적 안전해보이는 거예요. 그러니 그림은 그림대로 즐기고 동성애의 서브텍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죠. 원래 계획처럼 수연이 수미 정도의 나이였고 수미가 그보다도 더 연상이었다면 이 장면은 굉장히 노골적일 수 있었을 겁니다.

파프리카 카메라가 쭈욱 아래로 내려가는군요. 이런 식의 카메라 움직임은 필요 이상으로 음탕하게 느껴집니다. 카메라가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면 보통 그 위에서는 동생을 끌어안는 것보다 더한 짓을 하고 있기 마련이잖아요!

듀나 이 장면을 보면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그건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고블린 마켓 Goblin Market]입니다. 이 작품도 [장화, 홍련]처럼 동생을 구하려는 언니의 이야기지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부제도 [A Tale of Two Sisters]고요. 만약 제가 드림웍스를 위해 각본을 쓴다면 로제티의 시에 맞추어 주인공들의 이름을 로라와 리지라고 붙이겠어요.

로제티의 시도 [장화, 홍련]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에로틱하게 읽힐 수 있는 시구들로 가득하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유명한 다음 시구를 연상시키지 않나요?

Golden head by golden head,
Like two pigeons in one nest
Folded in each other's wings,
They lay down, in their curtained bed:
Like two blossoms on one stem,
Like two flakes of new-fallen snow,
Like two wands of ivory
Tipped with gold for awful kings.
Moon and stars beamed in at them,
Wind sang to them lullaby,
Lumbering owls forbore to fly,
Not a bat flapped to and fro
Round their rest:
Cheek to cheek and breast to breast
Locked together in one nest.

파프리카 듀나가 영화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시를 주절주절 읊는 동안 아침이 밝았습니다. 커튼은 마리오 바바 식으로 흔들리고, 책장이 바람에 넘어가며, 무현이 깨어납니다. 무현은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당연히 무서운 딸은 없습니다. 자기 방에서 있지도 않은 동생과 함께 자기 모습으로 잠들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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