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드디어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파프리카 수미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군요. 수미가 꾸는 꿈은 부서져있고 변형되어 있지만, 수연과 엄마가 죽던 날의 상흔과 그에 대한 죄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달리는 발, 고개를 돌리는 엄마, 옷장에 깔려 파닥거리는 수연의 손과 같은 것들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긴 머리 여자 아이는 누구예요? 임수정은 아니지요? 문근영도 아니고요.

듀나 어린 시절의 수미가 아닐까요? 정말 어린 시절에 그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꿈이란 게 그렇게 정확히 이치에 맞으라는 법도 없으니까.

파프리카 간신히 수미가 깨어납니다. 수미는 옆에 누운 동생을 보고 안심해요. 하지만 방심은 금물. 드디어 깜장 귀신이 등장합니다. 맨 처음엔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으흐흐흐... 이상한 아기 소리를 내면서 불구처럼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천천히 옆으로 기어왔다가 갑자기 쑥 위로 올라오네요. 수미에게 날아오는 귀신!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거기서 손이 쑤욱 내려오는데... 머리칼에 가려진 얼굴이 보이고...

듀나 이 장면의 아이디어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이지요. 악몽에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긴 머리 여자 귀신이 날아오는데, 알고봤더니 꿈이라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뭐랄까,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변주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흰 옷 대신 검은 옷을 입고 있고, 밤에 나타나는 대신 아침에 나타나고,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타이밍도 조금씩 어긋나 있지요. 그 때문에 처음보는 관객들에게 이 장면이 주는 효과는 굉장합니다. 충분히 겁을 줄 수 있을만큼 보편적이지만, 늘 관객들의 예측과는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니까요. 덕택에 공포효과는 배가 되고 그 체감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건 일회용입니다. 일어나는 사건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타이밍을 기억한 뒤 다시 영화를 볼 때는 같은 경험을 반복할 수는 없죠. 그러나 일회용이라는 것만으로 이 장면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어요. 많은 일급 공포 영화들이 사실 일회용이니까요. 여전히 보기가 좋기도 하고요.

파프리카 많이들 이 깜장 귀신을 [링]의 사다코와 비교하지만 긴 머리의 전통 귀신이라는 걸 빼면 유사성은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긴 머리 전통 귀신을 다시 공포영화의 무대로 끌어낸 게 [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요.

유사성을 찾는다면 깜장 귀신은 [검은 옷의 여인]에 나오는 귀신과 더 비슷하지 않아요? 둘 다 주인공의 꿈 속에서 나타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 귀신들이고 사람 무섭게 하는 방식도 아주 직설적이잖아요.

듀나 [검은 옷의 여인]은 작정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려 달려드는 악령이지요. 이 영화의 깜장 귀신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오히려 남편에게 배반당한 뒤 목매고 자살한 여자의 잔해지요. 공포는 불러일으키지만 악의는 없어요.

파프리카 전형적인 브뉴엘식 전통에 따라 수미가 또 깨어났습니다. 옆에는 여전히 수연이 잠들어 있고요. 이 영화에서 수연이 자는 장면 대부분은 문근영이 그냥 자는 장면이라고 하더군요. :->

듀나 무현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일어났니?"라고 묻습니다. 배우들은 관객들이 이 장면이 나올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는 게 신기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그건 아주 당연해요. 태엽감듯 바짝 조인 관객들의 긴장이 이 순간 갑자기 풀어져버리니까요. 이 때 관객들이 터트리는 허탈한 웃음은 그 앞의 공포효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증명하는 것이죠.

파프리카 일어나 창 앞에서 기지개를 펴는 수미의 모습은 화장품이나 생리대 CF처럼 보이는군요. 그 왜 틴에이저 아이들의 '백색 청순함'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그런 광고들 있잖아요.

수미는 자기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 침대로 돌아갑니다. 그건 동생 수연의 생리혈입니다.

또다시 카메라는 이불을 걷고 수연의 맨 다리를 따라 올라갑니다. 다들 아이들 가지고 이런 장면을 찍은 게 양심이 찔렸는지 스탭들을 다 내보내고 촬영감독은 눈을 딱 감고 이 장면을 찍었다고 하더군요.

듀나 악몽이 끝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수연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은 늘 조금씩 불안하지요. 공포영화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섭습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을 때도 말이에요.

파프리카 여기서 생리와 생리혈은 사람들이 여성의 육체에 대해 생각할 때 거의 미신적으로 연상하는 모든 불길함을 상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김지운은 변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생리라는 현상에 미신적인 선입견을 부정하고 일상화시키는 '정치적으로 공정한' 장면을 찍었다가 나중에 너무 화장품 광고처럼 예뻐서 삭제했다니 말이에요!

듀나 이런 이야기에서 정치적 공정성을 찾다가는 맥이 풀리기 마련이죠. 그 장면이 살아 남았어도 변명처럼 느껴지지 않았겠어요?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도 정치적인 면에 민감한 비평가들의 칭찬까지 받으려면 차라리 [진저 스냅]에서처럼 노골적으로 이슈를 끌어내는 게 더 편하겠죠. 그런다면 공포 영화의 자극과 야비함을 잃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면서도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접근법이라는 칭찬도 받을테니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걸 남자 감독/작가에게 기대하는 건 좀 무리인 것도 같네요.

파프리카 하여간 생리대를 찾으러 수미는 다시 적진으로 내려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은주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지요. 생리대를 꺼내 들고 수미가 탈출하려는데, 은주가 잠에서 깹니다. 여기서 첫번째 등장장면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만큼이나 부담스럽고 얄미운 염정아의 연기가 나옵니다. "생리하니?" "웃긴다. 어쩜 나랑 날짜가 똑같을 수 있지?" 전 이 장면과 마주칠 때마다 마구마구 어색해져요. 좋은 연기인데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거나, 좋은 연기가 아닌데 효과적인 것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뭔가 제대로 건드리는 연기이긴 한데 그게 조금 핀트가 어긋나 보이거든요.

듀나 물론 이것 역시 분명한 힌트죠. 수미 역시 생리 중이니까요. 세 여자가 모두 날짜가 같다는 건 그들이 모두 한 사람이라는 걸 암시하죠. 이 설정은 그럴싸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 같이 사는 사람들은 주기가 같아질 수도 있으니까 초현실적 현상과 실제 사실에서 오는 경험적 지식이 중간의 회색 공간에서 겹쳐지는 거죠.

카메라가 계단을 올라가는 수미의 다리를 또 잡는군요. 코멘터리에선 아마 여기서 김지운이 공포 영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전 이후에 나오는 화장실 장면에서 수연의 얼굴이 머리칼에 가려 반쯤 안 보인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어요. 의미가 무엇이건.

파프리카 수미는 생리대를 들고 방으로 돌아옵니다. 수연은 강아지같이 서글픈 얼굴로 시트의 핏자국을 바라보고 있어요. 귀엽네요. 자매는 이불과 시트, 베개를 챙겨들고 방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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