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깨끗하게 빤 침대 시트와 잠옷이 빨래줄에 매달려 세제 광고처럼 깔끔한 화면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수연과 수미는 집 앞에 앉아 있습니다. 수미는 엄마가 좋아했던 노래인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고 수연은 언니의 휘파람을 듣다가 열심히 흉내내려 하고 있어요. 얼굴과 양손을 앞에 내밀고 입술을 오므린 저 모양은 완전히 강아지 자세네요.

파프리카 이 장면은 원래 그네를 타는 장면이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잘 안되어서 집 앞으로 옮긴 것이라고 들었어요.

듀나 그네라면 잘 안되는 게 당연했어요. 이 장면은 완벽하게 짜여진 안정된 구도가 필수적이거든요. 사방으로 열려있고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에서는 힘들지요.

파프리카 은주의 새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새들은 아이들에게 은주의 상징입니다. 은주가 가지고 들어온 유일한 소유물이니까요. 결국 은주에 대한 수미의 분노는 새들을 죽이는 것으로 표출됩니다. 수미가 만들어낸 이 머리 속의 세계에서는 그 사건이 "죽여버릴까?" "날려 보내"와 같은 얌전한 대사들로 전환되지만요.

하지만 많은 [장화, 홍련] 팬들은 이 새들을 오히려 수미와 수연의 상징처럼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두 마리라서 그럴 거예요. 한 마리가 죽자 다른 한 마리도 따라 죽었다는 거지요. 과연 수미가 한 마리만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듀나 무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김지운은 당연한 게임을 하고 있죠. 정돈된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나뉘어진 공간은 살짝 오른쪽으로 움직여 프레임 밖에 있는 수연을 잘라버립니다. 수미와 무현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수연은 늘 고립된 프레임 속에 따로 잡히지요. 정작 대화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을 다시 요약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무현은 집에서 일어난 일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부녀 관계는 여전히 차갑다는 거요. 참, 옷장이 다시 언급됩니다.

파프리카 수미가 숲으로 들어갑니다. 늘 같이 다니던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네요. 아마 현실 세계의 아빠와 다투는 동안 잠시 동생의 인격을 날려버렸겠지요.

듀나 그리고 언니가 비닐 하우스에 있는 동안 '집에 홀로 남겨진' 수연의 '인격'이 죽은 새의 시체를 발견하고요?

파프리카 아하... 그게 좀 이상하긴 하군요.

숲 속으로 홀로 들어간 수미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 봅니다. 이 장면은 집에서 뛰쳐나간 수미가 갈대 숲 속에서 뒤를 돌아다보는 에필로그 장면의 전조와도 같죠. 아니면 잔재인가요? 뭔가 잘못되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더 있는데, 수미는 아직 그걸 모릅니다. 관객들도 확신은 못하고요.

듀나 수미는 숲 속에 있는 비닐하우스 창고로 들어가 거기에 있던 엄마 물건들을 가지고 나옵니다. [갈가마귀 키우기]를 연상시키는 또다른 장면이지요.

집으로 돌아온 수미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까만 원피스는 붉은 색 계열의 새 옷으로 바뀌지요. 이건 후반 액션을 위한 준비 과정 같습니다. 나중에 은주와 상대할 때 옷 색깔을 맞추어야 하거든요.

수미는 창고에서 가져온 옛 사진들을 바라봅니다. 흑백 사진들의 회고적 느낌도 [갈가마귀 키우기]와 비슷하군요. 하여간 이 아늑한 느낌은 아빠와 함께 일하던 간호사인 은주의 얼굴이 침입자처럼 끼여들면서 서서히 불길하게 바뀝니다.

여기서 전 당연히 무현이 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료 설정에 따르면 약사더군요. 전 의사인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편이 오해가 적고 또 이 영화가 다루는 작은 가부장적 세계의 상하구조를 그리는 데 편했을 것 같지 않나요? 물론 김지운은 '약종상'의 예스러운 분위기가 이 영화에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만.

파프리카 수미를 상대하는 무현의 덜 노련한 태도도 약사일 때가 더 설득력있지 않겠어요? 미희의 발작 장면에서 서툴게 대응하는 것도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고요.

슬슬 이 가족의 진짜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측해보지 않겠어요? 무현은 상당히 큰 병원에서 일하는 약사 같습니다. 하지만 집은 차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오는 시골 구석에 있지요. 아마 물려받은 재산이 꽤 있나 봐요? 무대가 되는 이 집은 십중팔구 가문대대로 내려온 곳일테니 말이에요. 집을 보면 이 집 가문의 과거가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울 것 같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교육은? 따로 사는 집이 도회지나 교외에 있고 이곳은 그냥 별장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도입부에 문을 열어주는 관리인의 모습이 잠시 나오니까요. 그렇다면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는 엄마가 아파서 이곳으로 요양을 왔던 것일까요?

듀나 여기서 수연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유령처럼요. 하지만 그 놀라운 느낌도 잠시. 자매는 다시 회상조의 달콤한 기분에 빠집니다. 따리따꿈. 따리따꿈. 아마 수연은... 아니, 수미는 [뽀네뜨]를 봤나보군요. 신자였다면 단순히 "엄마를 부르는 주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에요.

여기서 재미있는 건 다음 대사입니다. "누가 그래?"라고 수미가 묻자 수연은 당연하다는 듯 "엄마가."라고 대답해요. 이건 수연이 수미의 환상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은 대답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더 있어요. 이 장면에서 우린 수미의 환상이 집 안에 녹아있는 수연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어요?

수미는 수연의 팔에 생긴 상처를 발견합니다. 물론 이건 은주가 부엌에서 수연을 몰아붙였을 때 낸 상처죠. 아까 이야기하는 걸 잊었는데,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모든 게 수미의 환상이라면 어떻게 수미는 그 상처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수미가 수연을 마지막으로 본 건 밥 먹다 말고 뛰쳐나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어요.

수미는 "누가 그랬어? 그 여자가 그런거지?"를 외치며 동생을 다그칩니다. 거칠게 동생을 몰아붙이는 수미는 이 장면에서 거의 은주만큼 가해자처럼 보입니다.

"꺅!"하고 수연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뺍니다. 여기서 문근영이 짓는 표정은 참 묘하죠?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는 표정도 아니고요. 이 영화에서 이 배우의 가장 좋은 장면들이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아마 그래서 DVD에서 문근영이 제공해주는 정보들이 별 큰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자기도 말로는 설명을 못하는 거죠. 임수정의 연기는 달라요. 배우가 풍기는 분위기 자체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기본 연기는 직설적이고 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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