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무현이 면도를 하는 동안 수미는 은주에게 따지러 갑니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 건 굉장한 증오의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말다툼인데도 은근히 모노 드라마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단 임수정과 염정아는 모두 비슷해 보여요, 일단 그 또릿또릿하고 신경질적인 외모의 느낌이 비슷하고 붉은 색과 자주 색 계열의 옷도 맞춘 것 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연기 스타일이나 발음도 비슷해요. 전에 [씨네21]에서 봉준호가, 임수정이 닭이 모이를 쪼듯이 정확하고 빠르게 대사를 한다고 지적을 했는데, 그건 이 두 배우 모두에 해당이 돼요. 결정적으로 둘의 타이밍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같은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는 스턴트 더블들의 펜싱 장면처럼요.

듀나 수미와 은주의 말다툼을 듣는 무현이 잠시 잡힙니다. 다시 은주의 클로즈업. 하지만 아까의 야무진 "인과 응보"의 대사와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군요. 짐짓 걱정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너 도대체 왜 내려 온거니? 또 그런 말을 나한테 하네. 너 아직 병이 나은 게 아니었구나"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스토리와 연기의 불연속성은 중요합니다. 이 영화에서 그리는 사건들은 정말로 실제 세계에서 일어난 게 아니니까요. 이 모든 건 혼란스러운 정신이 멋대로 재조립해낸 악몽으로 결코 잘 짜여진 희곡과 같은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불균질성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개성이자 무기이지요.

은주의 "너 아직 병이 나은 게 아니었구나"는 결정적인 펀치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의 자살골이나 마찬가지지만요. 아마 여기서 수미는 잠시 동안이나마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겠지요. 수미는 논리적 대응을 포기하고 은주가 차를 따르려는 찻잔을 식탁에서 쓸어버린 뒤 퇴장합니다.

파프리카 계단에 앉아 있는 수연의 모습이 보여요.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잠옷을 입고 있네요? 콘티 실수일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실수처럼 보이는 것들도 다들 "꿈이고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하며 우길 수 있잖아요.

듀나 무현이 구석에 숨어 울고 있는 수미를 찾아갑니다. 무현은 또 수미를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면 넌 또 아프게 돼.") 이 장면에서 수미의 병이 정신적이라는 게 분명해지죠.

여기서 임수정의 연기는 정말 좋군요. 고함을 질러대는 초반엔 조금 흔들리지만 그 부분도 과시적인 느낌이 거의 없고 드라마틱하며 강렬해요. 그리고 그 뒤에 내뱉는 "앞으로 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아빠가 불러놓은 이 모든 더러운 일, 아빠가 책임져."라는 차디찬 선언은 소름이 쫙 돋아요.

전화벨이 울립니다. 선규한테서 온 전화겠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5 스크린 쿼터제 옹호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1] DJUNA 2010.02.22 2119
64 시네 스노비즘 [3] DJUNA 2010.02.22 3013
63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1. 프롤로그) [1] DJUNA 2010.03.06 3913
62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2. 등교) [7] DJUNA 2010.03.06 3265
61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3. 오전수업) [1] DJUNA 2010.03.06 2965
60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4. 점심시간 - 신체검사) [1] DJUNA 2010.03.06 3025
59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5. 오후자습) [1] DJUNA 2010.03.06 2712
58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6. 야간자율학습) [37] DJUNA 2010.03.06 5430
57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DVD를 다시 보다 (7. 하교) [1] DJUNA 2010.03.06 3138
56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1. 이 사람, 누구지?) [1] DJUNA 2010.03.06 3250
55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2. 수미, 수연) [1] DJUNA 2010.03.06 3569
54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3. 너희들 왔구나!) [1] DJUNA 2010.03.06 2584
53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4. 첫 날인데 그만하자.) [1] DJUNA 2010.03.06 2523
52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5. 그 여자도, 이 집도) [2] DJUNA 2010.03.06 2976
51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6. 악몽) [6] DJUNA 2010.03.06 3474
50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7. 그 여자가 그런 거야?) [1] DJUNA 2010.03.06 2477
» 심심한 듀나와 파프리카가 [장화, 홍련] DVD를 다시 보다 (08. 변하는 게 있어?) [1] DJUNA 2010.03.06 236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