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더 잘 알까?

2010.02.22 13:22

DJUNA 조회 수:3541

1.

우린 전문가들한테서 무얼 기대할까요? 전문가들이 자리잡고 있는 그 특정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네들이 해주기를 바랄 겁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 변기가 막혔다고 해서 전문 배관공이 아닌 제가 타일을 부수고 변기를 끄집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 때는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도록 교육받은 숙달된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배관공이야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면 음악이나 영화의 향유에도 전문가가 필요한 걸까요? 있다면 과연 전문가가 일반인들보다 나을까요?

사실 낫답니다.

어떤 예술작품도 허공에서 창조된 순수한 존재일 수는 없습니다. 장르의 법칙과 창작자가 속해 있는 사회의 환경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자주 드는 베토벤의 예를 다시 꺼내 볼게요. 우리가 순수 음악이라고 부르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서구 음악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틀어준다면 과연 그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에 능통한 음악 평론가만큼 감상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백지에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서구 음악이라는 것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걸 통과한 뒤에는 5번 교향곡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의 형식과 구조를 꿰뚫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서구 음악사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더욱 좋고요.

다시 말해 5번 교향곡을 제대로 듣고 감상하려면 상당한 사전 교육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냥 뛰어들 수는 없어요.

클래식에 문외한인 관객들은 그 유명한 5번 교향곡도 그렇게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닐 겁니다. 유명한 '빰빰빰 빠!'가 나오면 잠시 귀가 열리겠지만 그 뿐이겠지요. 가끔 멜러디가 좋다면 따라 부르겠지만 더 이상 나갈 리는 없을 거예요. 문외한들에게 5번 교향곡은 40분짜리 혼돈입니다.

이는 천문학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진들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워 보이지만 문외한에게는 보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에게 그 사진은 우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창입니다.

한 예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기초적인 지식, 숙련도 그리고 심미안. 마지막 것은 타고난 것이라고 치더라도 앞의 둘은 노력 없이 얻을 수 없습니다.

영화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언어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됩니다. [전함 뽀쫌낀]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우디 알렌이 [사랑과 죽음]에서 그 영화를 패러디할 때 웃을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편집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네 멋대로 하라]의 자유분방한 느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2.

영화 편집자는 전문가입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전문가고 촬영 기사도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영화 평론가는 어떨까요? 영화 평론가가 영화 일반에 대해 배관공만큼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화는 영화 언어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소재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되기 마련이고 그 세상은 참 넓습니다.

만약 한 영화 평론가가 자신의 고다르나 버스터 키튼 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우린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일반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겠죠.

배관공이 전문가인 이유는 그가 노는 터가 전적으로 배관 기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 평론가의 터에서 전문 지식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사실 그가 전문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도 막연한 인문학 지식의 구석에 걸터 앉아있는 것에 불과하죠.

우리가 배관공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그 분야에서 일반인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배관공을 쓰면 좋겠지만 허가증이 있는 배관공이라면 아무리 나쁜 배관공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인보다는 실력이 뛰어나기 마련입니다. 그가 전문가라는 것만으로 그 분야에 대한 우월성은 결정됩니다. 전문가로서의 상대적 재능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하지만 영화 평론가라고 해서 전문가로서 일반인보다 특별히 나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의심나시면 아무 영화 잡지나 꺼내서 그 사람들의 기사나 평을 읽어보세요. 화장실 변기를 고치는 배관공의 전문성에 필적하는 전문적인 글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 중 몇 개는 영화 소재에 대한 여러분의 일반 지식에도 못미쳐서 배꼽 잡을 실수와 오독을 저질렀을 거고요. 영화가 영화 언어만의 종합이라면 이런 일은 없죠.

영화 평론가의 질을 결정 짓는 것은 전문 기술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심미안입니다. 우린 결국 그 사람의 전문가적 부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반인으로서의 눈과 손의 질에 기대는 것입니다. 물론 정확한 지식이 따라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역시 그것은 부차적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배관공과 같은 수준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일반 지식인이죠. 인터넷과 같은 정보 유통도구의 발전으로 정보 공유의 평등성이 확장된 요새는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요샌 영화 지식 같은 건 아주 일반적이 되어 버렸지 않나요?

사실 그게 당연한 일이겠죠. 예술이란 의사소통의 도구입니다. 전적으로 전문가들만을 위한 예술이라면 뭔가 이상한 거죠. 특히 대중 예술을 자처하는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더욱 그렇고.

문제는 그네들이 그러면서도 전문가로 행세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이 경우 그네들은 필사적으로 일반인과 자신 사이의 골을 넓히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 결과로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노골적인 스노비즘이죠.

이게 오늘의 교훈입니다. 아마튜어리즘은 자신의 아마튜어리즘을 인정할 때 건강할 수 있다는 것. 스노브는 가짜 전문가가 썩고 남은 잔해라는 것. (9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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