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010.03.05 09:49

DJUNA 조회 수:3724

"New York, New York--it's a helluva town; the Bronx is up and the Battery's down; the people ride in a hole in the ground...."라고 뮤지컬 [온 더 타운 On the Town]의 세 수병들은 노래했습니다. 이들이 이 유명한 뉴욕 찬가를 처음 부른 건 제2차 세계 대전 중엽 (영화는 49년에 나왔지만 무대 뮤지컬은 그 이전에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겨우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아직 지하철은 희귀한 존재였습니다. 그건 뉴욕과 같은 거대한 도시에 강렬한 기계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땅 속에 판 구멍을 질주한다니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로맨스 역시 지하철에서 일어납니다. 진 켈리의 캐릭터 게이브는 지하철에 붙은 '이달의 미스 턴스타일'에 반하고 우연히 역에서 그녀를 만난 그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전 뉴욕을 뒤지고 다니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하철이 얼마나 로맨틱한 기계인지 아나요? 맨날 이 길쭉한 강철 김밥과 같은 기계를 타고 지겨운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가는 소리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시길. 지하철과 같은 대중 운송 기관이 발달하기 전엔 사람들이 누구랑 연애를 했나요?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동네 이웃들과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한마디로 지속적인 연애가 가능한 사람들은 동네 안에 있었던 겁니다. 지하철과 같은 대중 교통 수단이 발명되자 연애 범위는 넓어졌습니다. 이제 부천에 사는 여자와 의정부에 사는 남자가 연애를 하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하철 발명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여러분도 그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남편 또는 아내 또는 레즈비언/게이 파트너를 만난 것도 십중팔구 대중 교통 수단에 의해 넓어진 활동 공간 때문일테니까요.

대중 교통 수단으로는 버스나 택시도 있지만 지하철은 그 중 가장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버스나 택시는 유동적입니다. 하지만 지하철은 엄청난 사고가 없다면 선로에 고정되어 있으며 시계처럼 째깍째깍 움직입니다. 마치 중세 사람들이 우주의 모델로 이용했던 '천상의 시계장치'처럼 말이죠. 물론 그 우주는 종종 이상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부천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던 아르헨티나 영화 [뫼비우스]에서 지하철은 위상기하학적으로 변형된 공간으로 사라져버리니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많지 않죠. 지하철은 대개 정시에 도착합니다.

덕택에 지하철은 흥미로운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슬라이딩 도어즈]에서 기네스 팰트로의 인생이 그처럼 엄청나게 갈라진 것도 순전히 지하철 덕택입니다. 지하철을 놓친 첫 번째 시간선에서 바람난 애인 때문에 고생하는 기네스와는 달리 지하철을 탄 두 번째 시간선의 기네스는 괜찮은 스코틀랜드 남자를 만나 사업도 번창하고 청혼까지 받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모두 시간을 양화시켜 절단하는 지하철 시간표라는 마술적인 시스템 덕택입니다.

이 시스템은 꼭 로맨틱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프렌치 커넥션]에서 지하철의 미닫이 문과 시간표는 지능적 범죄자와 뉴욕 형사의 교묘한 두뇌 싸움의 도구입니다. 상황은 간단합니다. 형사는 범죄자를 미행해야 하지만 과연 범인이 지하철을 탈까요, 내릴까요? 승리는 우산이라는 여벌 무기와 더 똑똑한 머리를 가진 범죄자 페르디난드 레이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 째깍거리는 우주의 엄격함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도 있습니다. [머니 트레인]에서 우디 해럴슨은 급료 수송 지하철을 털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은 버스와는 달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결국 해럴슨과 웨슬리 스나입스는 선로 속에 갇혀 빙빙 도는 지하철을 타고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봤는데, [머니 트레인]이 더 어두운 영화였다면 더 성공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빙빙 도는 지하철에는 비극적이고 침울한 은유가 숨어 있습니다. 지하철은 로맨틱하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기계이기도 합니다. 땅 속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이 기계의 침침한 모습을 보세요. 이 기계를 타고 직장을 가는 동안, 우리는 땅 위의 다른 사람들보다 지옥에 몇 발짝 더 가까이 있습니다.

[미믹]의 지하철을 보세요. 인간을 위장한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숨어살며 우연히 떨어지는 바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끊어진 선에 버려진 지하철 객차 안에서 바퀴벌레들과 싸우는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단테의 지옥에 떨어진 셈입니다.

정말로 지하철이 지옥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볼케이노]에서 엘에이는 갑작스럽게 솟구친 용암으로 난장판이 됩니다.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한 곳은 마침 운행 중이던 지하철. 용암이 선로로 흘러들어가는 이 끔찍한 상황은 치명적인 오판을 내린 한 남자에게 목숨을 바친 속죄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은 보다 다른 방식으로 지옥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변호사 알 파치노는 자가용보다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이유는? 그는 악마이기 때문에 지옥에 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편하니까요. 게다가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지하철 편이 일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엔드 오브 데이즈]에서는 지하철도 악마에겐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로빈 튜니에게 근사하게 종말을 예고해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왜 가브리엘 번 악마는 자기 터나 다름없는 지하철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에게 그처럼 처참하게 당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아마 요샌 지하철도 악마에게 그처럼 관대하지 않은 모양이죠. 지하철 사고가 나면 모두가 당합니다. 악마도 예외일 수는 없어요.

지하철 사고는 버스 사고보다 무섭습니다. 우선 드물고, 지하 철도라는 우주와 시간표라는 우주의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스피드]나 [다이 하드 3]은 이런 위험을 극으로 이용합니다. 둘 다 엄청난 사고를 그럴싸하게 보여주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스피드]가 더 잘 된 것 같군요. 특히 마지막에 데니스 호퍼의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은 제가 생각하는 지하철 사고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습니다. 지하철에서는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사고도 마찬가지죠. 머리가 장애물보다 높이 있다면 당연히 잘려나가야죠.

하지만 꼭 영화 속의 지하철 사고가 그처럼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만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지하철 사고는 1시간 동안의 암흑과 정전 속에서 반짝이는 휴대 전화의 춤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봉수는 그걸 보며 전화 걸 상대가 없는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겠지만, 제 눈에는 우리가 사는 인공 세계의 로봇 반딧불들이 추는 춤처럼 보입니다.

그와는 조금 다른 나비가 작은 기적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습니다.[유브 갓 메일]에서 지하철에 날아든 나비와 같은 것들을 보세요. 뉴요커 나비였으니 배터리에서 브롱크스로 날아가는 대신 지하철을 이용했는지 몰라도, 그 나비를 바라보는 멕 라이언과 관객들의 눈에 그 작은 곤충의 존재는 얼마나 신비스럽게 느껴졌던지요. (0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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