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는 '영화제'가 아닙니다. 같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투표로 뽑는 영화상이지요. 아카데미한테 엉뚱한 불평을 하지 않으려면 이 점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칸느와 같은 영화제가 주는 상은 대부분 뚜렷한 개인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사의원들과 심사위원장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보면 '올해 영화제가 대충 어떻게 흘러가겠구나'하고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어요. 같은 칸느라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주었던 빔 벤더스의 칸느와 [미션]에 황금종려상을 주었던 시드니 폴락의 칸느는 다릅니다.

수상 결과는 심사위원단의 취향을 반영합니다. 칸느나 베를린의 상은 구체적인 개인 또는 소수 집단의 의지가 작동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그들에게 책임을 떠 안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다릅니다. 아카데미는 곧장 말해 인기 투표입니다. 시드니 폴락은 [미션]에 상주려고 꽤 고민하고 생각했으며 투쟁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기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 따위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투표란 스트레스 같은 건 없는 작업입니다.

그들은 대충 대세를 따릅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기네스 팰트로가 받은 여우주연상을 생각해보죠. 저도 팰트로가 그 영화에서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사람이 상 받은 게 그렇게까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받았다면 팰트로 자신의 경력에도 더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번 후보자 리스트는 훨씬 인상적인 연기를 한 배우들로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부터 그 동네에서 조성된 분위기는 "팰트로에게 여우주연상을!"으로 몰려가고 있었지요. 헐리웃 사람들이 팰트로한테서 새로운 오드리 헵번을 발견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죠. 누구 말마따나 영국 악센트로 말하는 유일한 미국인 배우여서 그럴 수도 있겠고요.

이런 것들은 구체적인 연기력 비교와는 상관 없습니다. 팰트로의 수상은 의식적인 연기력 평가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건 홍수나 조수와 같은 자연 현상에 가깝습니다. 투표단은 거대한 변형균처럼 그냥 움직인 겁니다.

자연 현상을 비난하는 건 허무한 일입니다. 그건 그냥 거기에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조수를 비난하는 대신 조력 발전소를 세울 겁니다. 그리고 그게 헐리웃 마케팅 담당자들이 하는 일이죠.

이건 정당하게 상을 받아야 하는 영화로부터 상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아카데미에서 '정당'한 것은 그 영화의 인기도입니다. 만약 미라맥스가 열심히 투쟁해서 그 인기를 얻었다면 그네들이 상을 받는 건 정당하고 공정합니다.

올해 하비 웨인스타인이 상 받으러 나와서 가장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시한 사람들은 바로 그의 마케팅 담당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들어 마땅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미라맥스의 뒷마당으로 만든 건 바로 그 사람들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미라맥스의 마케팅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론가 타이 버는 올해 아카데미 후보들을 예측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미라맥스 영화들을 구석에 밀어내면서 "투표단 사람들이 미라맥스의 마케팅 전략에 반발하게 될 것"을 그 이유로 삼았습니다 (버의 코멘트는 DCN 중계 때 강한섭 교수에 의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인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버는 틀렸습니다. 올해의 승자는 여전히 미라맥스였습니다. 버는 투표단을 과대평가했습니다. '반발'은 상당한 정신적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일반인 대다수는 그런 짓 따윈 하지 않습니다. 아카데미 투표단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라맥스가 수백만 달러를 들여 거대 마케팅을 벌이고 또 그게 여전히 먹히는 거죠.

그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대중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일반 정치가들이 하는 일을 훨씬 순수한 목적을 위해 하고 있을 뿐입니다. (9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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