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읽어야 할 이유

2010.02.22 13:40

DJUNA 조회 수:2725

오페라나 연극, 발레처럼, 영화는 먹성 좋은 장르입니다. 다른 장르에서 끌어온 소재를 자기 것으로 전환시키기 쉽다는 소리죠. 특히 소설은 좋은 밥입니다. 요새 상영되고 있거나 상영될 예정인 [리플리][그린 마일][애수]와 같은 영화들도 각색물들이잖아요? 물론 영화를 소설로 각색한 영화 소설이라는 것들도 있지만, 그런 작품들 중 진짜로 괜찮은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영화 소설들([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제3의 사나이])은 대부분 원작자가 직접 쓴 작품들로, 영화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나리오와 함께 쓰여진 독립된 소설입니다.

이런 각색물들을 감상하기 전엔 다양한 조언들이 쏟아지기 마련이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개를 골라보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를 봤다고 소설까지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지 말아라." 각색물을 보는 입장은 정반대지만 하려는 말은 같죠. 아무리 각색물이라고 해도 영화 자체로 봐야지, 원작의 부속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빅터 플레밍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동명 소설의 멀티미디어 버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의 노래 버전 이상인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원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각색물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관객들한테는 별 무리가 없습니다. 관객들은 정서적 충만감을 위해, 미적 감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화끈한 액션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영화를 봅니다. 관객들에게 영화는 영화일 뿐이며, 오리지널이나 각색물이나 모두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나 저널리스트들의 사정은 다릅니다. 그들은 영화 감상 이상의 일을 해야 하니까요. 그들은 영화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리플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매체들이 이 영화를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라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리플리]는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는 아닙니다. 둘 다 원작이 같고 [태양은 가득히]가 먼저 만들어졌을 뿐이죠.

이게 중요한가요? 관객들한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한테는 중요하죠. 만약 한 평론가가 [리플리]를 [태양은 가득히]의 리메이크라고 생각하고 오리지널에서 '변형'된 과정을 추적하려고 한다면 엉뚱한 일이 일어나고 말 겁니다. 소위 오독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죠. 특히 [리플리]처럼 [태양은 가득히]의 영향이 거의 없는 영화는 그렇습니다.

비슷한 예로 여러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두 남자의 관계를 보고 '히치콕'적이라고 했던 것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로 든 것은 [열차의 이방인]이었어요. 하지만 두 남자의 동성애적 대결 구도는 히치콕의 개성이 아닙니다. 그건 두 영화의 원작을 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개성이지요.

작가주의의 비평의 습관이 지나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작가주의자들이 뭐라건, 영화는 집단 창작물입니다. 심지어 히치콕의 영화도 히치콕만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요. [현기증]의 예를 들어볼까요? [현기증]은 매우 히치콕적인 작품이지만, 이 영화를 지배하는 꿈꾸는 듯한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원작 소설을 쓴 콤비 작가인 브왈로와 나르스자끄의 개성입니다. 그렇다면 [현기증]의 일탈된 정서는 히치콕이 옆길로 나간 결과일까요, 아니면 히치콕은 원래 자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브왈로와 나르스자끄의 개성이 히치콕의 개성을 오염시킨 것일까요?

이런 개성이 주제와 연결되면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다시 한 번 히치콕의 예를 들어볼까요? 전 [레베카]의 서브 텍스트에 대한 매력적인 페미니즘 비평을 읽은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서브 텍스트들은 대프니 뒤 모리에의 원작에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서브 텍스트들에 끼친 히치콕의 공적은 무엇일까요? 반대의 예를 들어볼까요? 히치콕의 후기작 [새] 역시 대프니 뒤 모리에의 소설을 각색한 것입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을 매료시키는 이 영화의 서브 텍스트들은 모두 영화를 위해 직접 쓰여진 것이고 원작과는 거의 관계 없습니다. 그럼 '책임'과 '공적'을 따지는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은? 원작을 읽어야겠지요!

그러나 그러기는 쉽지 않습니다. [현기증]을 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원작인 [죽은 자들 사이에서]를 찾아 읽는 건 쉽지 않죠. 해외 작품일수록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원작을 구하기가 더 힘드니까요.

그 결과 비평은 종속적이 됩니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외국 비평가들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지요. 원작을 무시하고 감독에만 매달린다면 비평은 불완전한 것이거나 오독이 될 것이고요.

해결책은? 영화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건 참고서 읽기가 아닌 텍스트의 직접 독서를 통해 가능한 것이겠지요. 세상엔 쉬운 게 없죠? (0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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