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새 텔레비전 영화 관련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인터뷰 도중 유달리 자주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저희는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메디칼 미스테리라는 장르를 개척했거든요..." 또는 "저희는요, 한국 최초로 컬트 코미디라는 장르를 선보이거든요..."

언제부터 이런 신종 장르들의 창시를 과시하는 인터뷰와 광고가 갑자기 늘어났는 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제 기억엔 [조용한 가족]이 그 중 가장 오래된 것 같습니다. [조용한 가족]의 포스터 위에 붙은 '잔혹 코믹극'이라는 딱지는 지금도 꽤 강하게 머리에 남거든요. 이 이름을 붙인 게 누군지는 몰라도, 그 영화의 마케팅에 꽤 보탬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 그래서 이런 유행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죠.

마케팅이야 제 소관이 아니니까 뭐라고 말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딱지 붙이기가 아주 아주 불만스럽다는 걸 고백해야하겠군요. [조용한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조용한 가족]이 가장 문제죠. '잔혹 코믹극'이라는 딱지는 이 영화의 무표정한 블랙 유머를 아주 망쳐놓는 이름입니다.

이런 종류의 '삼가 말하는' 코미디는 정의되지 않은 일상 공간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배경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일수록 내용의 잔혹한 유머가 두드러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미리 '잔혹 코믹극'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으면 그런 공백은 사라집니다. '잔혹'과 '코믹'이라는 단어가 시작도 하기 전에 영화를 정의해버리는 거죠.

이건 농담을 이야기하기 전에 혼자 웃어버리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아요. 이러니 영화를 보는 동안 그 감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까 마케팅이 제 소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결국 이 딱지 붙이기는 아주 성공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손님을 끄는 데엔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광고가 영화 보는 재미를 감소시킨다면 그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좋아요. 촌스러운 마케팅이라 이거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될까요?

아무래도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 제 귀에 들리는 인터뷰들은 너무나도 고지식해서, 정말로 그네들이 그런 종류의 장르를 찍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장르란 뭡니까? 공통된 성격을 가진 개체들의 무리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이 장르의 영화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이미 잠재 관객들이 알고 있는 어떤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조용한 가족]은 장르 영화일까요? 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해리와의 트러블]이나 [이니드는 자고 있어요]같은 영화들이 그 대표적인 예죠. 대부분 살인이나 시체와 같은 소재들이 무표정한 사람들과 설정 속에 말려들면서 블랙 코미디가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조용한 가족]에 마케팅 담당은 이중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조용한 가족]이 어떤 장르에 속해있다고 주장할 생각이었다면 원래 '잔혹 코미디'라는 이름의 장르가 없으니 거짓말입니다. 만약 이것이 신종 장르라는 주장을 할 생각이었다면, 예전에도 그런 영화들이 수두룩했으니 역시 거짓말입니다.

그건 [닥터 K]의 '메디칼 미스테리'나 [신장개업]의 '컬트 코미디' 딱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왜 있지도 않은 장르를 억지로 만들어서 그 안에 자기를 가두려는 걸까요?

2천 살이 넘는 유교 문화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화권에서는 '이름'이 아주 중요하니까요. [신장개업]의 마케팅 팀이 '컬트 코미디'라는 딱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사실 영화를 만들 '명분'을 세우고 있었던 거죠. '컬트 영화,' 'B급 영화'와 같은 남의 동네 영화 현상을 애써 가져와 대항적인 영화/영화 문화를 만들려고 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대항적이었지만, 그들 역시 체제순응적인 건 마찬가지였죠. 권위를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게 달랐을 뿐이지.

일단 명분이 만들어지면, 관객들과 비평가들도 그 명분을 따라갑니다. [퇴마록] 때를 생각해보세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생각없는 딱지에 얼마나 많은 관객들과 비평가들이 집착하고 매달렸던가요? 그 이름의 힘은 너무 강해서 마케팅 팀이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조용한 가족]이나 [퇴마록]은 그런 명분이 필요없는 영화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두 영화 모두가 나름대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가짜 복음서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권위를 위조하고 있단 말입니다.

두려움과 사대주의의 냄새가 느껴집니다. 특히 그들이 '한국 최초'라는 말을 내세울 때 그렇습니다. 그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화는 세련되고 믿을 수 있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다른 동네에서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도대체 자기 하는 일에 이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무얼 하겠어요? (9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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