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자들

2010.02.22 11:08

DJUNA 조회 수:2429

1.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세상이 갑자기 이상해집니다. 지금까지 사실로 알아왔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가짜로 드러나고 정든 고향은 엑스트라들로 가득 찬 세트가로 변합니다. 내가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정말 세계가 나를 속이는 것일까요?

이게 트루먼 버뱅크만의 고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이 할리우드 편집증의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할리우드 편집증은 더 큰 서구 문화의 부분집합이지요.

그 시작은 어디일까요? 가장 최근의 예로 사람들이 드는 것은 [뉴 트왈라이트 존(환상특급)]의 3시즌 에피소드인 Special Service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사생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레너드 말틴과 같은 평론가는 이 에피소드를 [트루먼 쇼]보다 높게 치더군요.)

그렇다면 [트루먼 쇼]는 표절작일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그 동네 편집증을 과소 평가한 것입니다. [트왈라이트 존]의 경쟁 시리즈였던 [아우터 리미츠(제3의 눈)]에서도 이미 비슷한 에피소드를 다룬 적이 있었으니까요. 이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방송사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사생활을 다룬 티비 쇼가 엄청난 시청률을 올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트왈라이트 존]이 [아우터 리미츠]의 표절작? 제발 그 동네를 과소평가하지 말라니까요! 폴 바텔은 1960년대에 이미 고전이 된 단편인 Secret Cinema로 엿보기 영화의 견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폴 바텔이 처음일까요? 천만에요! 솔직히 말해, 이런 소재는 SF 세계 안에서 쎄고 쎘습니다. 약간의 상상력만 풀게 도와준다면, 사람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기만하고 엿보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아주 일상적인 공포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편집증에 빠질까요? 인식론적으로 따진다면 간단합니다. 우리의 감각이 현실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믿어야 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정보의 부재는 불신을 만들고 불신은 다른 시나리오를 만듭니다. 자신의 감각만큼 원초적인 정보도 믿을 수 없다면 이런 시나리오가 20세기에서야 간신히 나왔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20세기? 저도 바보같군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도입부도 엘리자베스 왕조식 [트루먼 쇼]가 아닌가요.)

2.

왜 사람들은 음모설을 만들어낼까요? 이유야 여럿 있겠죠.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앞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걸 하나 들어보기로 하죠.

제 일가친척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당시 그 '일가친척'은 학교 독서토론 때 [자연변증법]을 읽고 막시스트 선배와 말싸움을 한 적 있었답니다(요새도 학교에서 이런 책을 읽는 지 모르겠군요.) 그 일가친척은 한마디로 그 책이 개떡같다고 생각했고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동안 그 선배가 이런 비판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자연과학적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선배에게 20세기 과학 문명의 산물을 전파하기로 마음먹은 그 사람은 멘델리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열거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그 막시스트 선배는 말도 안된다고 떠들어댔습니다(멘델리즘은 골수 막시스트들에게 상식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가 댄 근거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는군요. "그게 아니란 걸 소련 과학자들이 밝혀냈단 말이야! 하지만 서구 과학자들이 그걸 은폐하고 있는 거야!"

아하.

그래프를 하나 그려보죠. 음모이론을 설명하려면 대충 두 선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위쪽에서 살며시 기우뚱하게 내려오는 '지배계급의 정보 독점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일반 대중의 주인의식/정보습득욕구'입니다. 아래의 선이 위의 선과 가까워지면 음모 이론이 생겨납니다.

다시 말해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하단 말이죠. 이런 경우 발생원이 미심쩍은 공급이 따르는 건 당연합니다. 음모 이론의 발생이란 경제학적으로 따진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굳이 세기말의 공포 따위의 시적 설명을 달 필요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먹히기 시작한 게 지난 세기부터이니, 이런 것들이 본격적으로 유행할 때도 되긴 되었지요.

[JFK]를 장식하는 올리버 스톤의 세계관은 이 둘을 결합한 결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미국정부의 쓸데없는 정보보안원칙 때문에 존 에프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정보는 거의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 에프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음모 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생산이 많으면 그 중 질이 높은 물품이 나오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질이 높은 음모 이론은 일단 조리가 맞고 재미가 있으며 또 수요자의 구미에 맞는 것들입니다 (케네디 암살 음모설 지지자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좌파들이니까 이들의 구미에 맞으려면 군수업자나 공화당을 악당으로 만들면 되지요.)

올리버 스톤이 그 많고 많은 음모이론 중 짐 개리슨의 음모 이론을 골라내 188분(감독판은 205분)짜리 영화를 만들어 낸 것도 위의 두 이유 때문입니다. 하긴 짐 개리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누가 알까요. 이치에 맞는다고 꼭 사실은 아니며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거짓인 것도 아닙니다.

개리슨 음모 이론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짐 개리슨의 음모 이론이 올리버 스톤의 구미에 맞고 또 그것이 스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톤이 개리슨이 고발한 음모자들을 고발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 케네디를 죽였다고 믿어서라기보다는, 그가 그 음모가들과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네들이 진짜 살인자라면 더욱 좋고요.

이 선에서 소망과 믿음은 어정쩡하게 결합됩니다. 나름대로의 소망충족이겠지만, 스톤은 아직도 개리슨의 설을 믿고 있습니다. 그는 그 믿음을 나름대로의 시적 정의로 표현한 적 있습니다. 스톤은 몇 년 전에 [와일드 팜]이라는 제목의 근 미래 미국을 무대로 한 사이버펑크 미니 시리즈를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시리즈엔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스톤 자신이 시리즈 속의 티비 토크 쇼에 직접 출연하고 그 쇼의 진행자는 게스트인 스톤에게 물어요. "개리슨의 음모이론이 사실로 밝혀졌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3.

최근엔 음모 이론의 상업적 입지가 상당히 단단해졌습니다. 수퍼마켓 타블로이드의 성공이야 기초적인 거고 일단 인터넷의 등장이 보급을 훨씬 용이하게 했지요. 다이아나 비가 죽고 난 뒤 음모이론들이 등장한 속도를 보세요! 예전 같으면 그 정도 숫자의 음모설이 보급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렸을 겁니다.

게다가 음모 이론은 원래부터 생산성 높은 산업이었습니다. 이치만 맞으면 다른 이론들과 모순되어도 상관없으니 생산량엔 제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충족이란 상당히 좋은 수요를 창출해내지요. 사람들이 그런 음모이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재미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히틀러의 귀신이 들린 고양이 이야기 따위가 정말로 신문의 판매부수를 높히는 건지 생각해보세요. 제 정신인 사람 중 누가 그 따위를 믿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신문을 삽니다. 할리우드가 음모 이론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음모 이론은 공식적 역사보다 재미있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음모 이론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 중 가장 모범적인 것은 존 그리샴 원작, 알란 제이 파쿨라 감독의 [펠리칸 브리프]입니다. 철저하게 가공의 음모 이론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약간 재미를 떨어뜨리긴 하지만 그래도 파쿨라 감독의 이 영화는 음모이론가들의 편집증과 소망을 가장 모범적으로 재현해냅니다. [컨스피러시]에서도 정신나간 택시 운전사의 음모이론 중 하나가 정말로 드러나 '진실은 승리하리라'의 감동적인 결론으로 몰고 갑니다. 음모이론가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결말이 아닐 수 없지요.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재미있어집니다. [펠리칸 브리프]나 [컨스피러시]와 같이 얌전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음모 이론을 만들어내는 영화들도 있지만, 요새 나온 정말로 흥미진진한 작품들은 음모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음모 이론을 가지고 노니까요.

[멘 인 블랙]은 그 중 가장 쉽고 노골적인 작품입니다. [멘 인 블랙]의 세계에서는 수퍼마켓 타블로이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어머니나, 어머니나!) 물론 이 농담이 진짜로 먹히는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란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얌전한 [컨스피러시]도 비슷한 종류의 아이러니칼한 농담을 하고 있습니다. 멜 깁슨이 연기한 정신나간 택시 운전사는 정체불명의 악당들에게 쫓기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맞았구나, 하지만 뭐가 맞았지?'

그 정수는 [엑스 파일]입니다. [엑스 파일]은 음모 이론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장난을 다 치는 작품입니다. 멀더 입장에서 다룰 때는 마치 정부의 UFO 음모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 것처럼 다루다가, 갑자기 뒤로 쑥 빠져서는 그것이 멀더의 편집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만들고, 다시 그것을 또다른 음모로 여기게 하더니, 이번에는 위로 쑥 올라가 음모이론과 음모 대상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하다가, 다시 갑자기 대상 앞으로 뛰어들어 마치 SF의 대상인 것처럼 정공법으로 치다가...

대부분의 [엑스 파일] 팬들은 멀더의 음모 이론이 사실로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가장 좋아하겠지만 그 정도로 열광적이지 않은 저한테는 살짝 위로 뜬 이야기들 쪽이 더 재미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다린 모건이 쓴 3시즌 에피소드들인데, 그 중 [호세 청의 소설]은 여러 번 되풀이 볼 만 합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모건은 아주 진부한 UFO 이야기를 멋대로 펼치며 왜 음모 이론의 수요자들이 이런 음모들에 매료되는 지에 대해 능글맞게 떠들어댑니다. 그것만으로도 재미있지만 모건은 더 나아가 [라쇼몽]식 다층적 진실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물론 [호세 청...]의 세계관은 [라쇼몽]보다 더 복잡미묘합니다. [라쇼몽]과 달리 [호세 청...]은 경박하고 성의없는 농담이니까요(진지한 사람은 결코 극한까지 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한계를 실험하는 자들은 언제나 경박한 사람들입니다.)

4.

"역사가 우리를 심판하리라"라고 어떤 낙천적인 혁명가가 말했습니다. 이 순진한 선언은 아마 우리의 용감한 음모론자들에게 훨씬 잘 먹히는 말일 겁니다. 얼마나 많은 음모이론 추종자들이 이 선언을 곱씹으며 정부와 전문가와 상식의 돌팔매를 견디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그들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세상 어느 구석엔 멜 깁슨의 대사를 외치고 있는 음모론자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맞았구나, 하지만 뭐가 맞았지?" 우리가 할리우드와 [엑스 파일]한테서 주워들은 이야기 중 진짜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백악관이 정말 금성인 조언자를 두고 있는 지도 모르고 (정말 그렇다면 그네들도 실력이 별 게 아닐 거라는 생각밖에 안 들지만) 케네디 암살에 정말 배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지구 전체가 거대한 트루먼 쇼라서 우리가 외계인들의 인생 극장같은 오락거리일 지도 모릅니다. 그 중 하나라도 정말이란 게 드러난다면 우린 애써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어. [트루먼 쇼]나 [엑스 파일]을 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코스타 가브라스 같은 사람은 최근에 비밀이 해제된 칠레 쿠데타 관련 서류를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언젠가 [미싱]을 한 번 더 봐야겠군요.)

음모란 세기말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정보 통제가 있는 이상 음모는 어디선가 존재합니다. 그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죠. 음모가 존재한다면 음모론자들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지금도 그들이 음모 이론이라는 산탄총으로 진실이라는 새를 잡고 있는 중인지 누가 알까요. 가짜가 워낙 많아서 어느 게 진짜인지 아무도 모르는 게 흠이라면 흠이긴 하지만. (9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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