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불공정한 존재로서의 예술

2010.02.22 11:13

DJUNA 조회 수:2085

1.

[에버 애프터]를 꽤 재미있게 보아서, 아는 사람들 몇 명한테 보라고 꼬셨답니다. 그런데 정말 그 꼬임에 넘어가 영화를 본 친구 한 명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오더니 무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봅니다.

왜냐고 물어보았죠. 그러자 그 친구는 매우 성실한 페미니스트의 포즈(그게 어떤 거냐고 묻지 마세요. 말로 설명하기가 참 그렇군요)를 취하고는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좋아, 공주표 신데렐라가 아닌 건 좋았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가기는 했어? 결국 왕자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가 아냐? 그것도 드루 배리모어가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면 통하긴 했을까? 게다가 과연 그게 정치적으로 공정한 요소야, 아니면 배리모어의 톰보이쉬한 매력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야? 왜 계모들은 늘 그렇게 악역으로만 나와야해? 왜 이런 영화에서 여성성은..."

에헴, 저흰 이미 [에버 애프터] 별점 평가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신데렐라]같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왕자 만나 구원받는 스토리에 봉사하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에, 주제라고 할 만한 이 덩어리를 바꾸면 작품 자체의 균형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에버 애프터]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데렐라] 이야기는 끝에 가서 왕자와 신데렐라가 결혼하는 이야기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계모가 악역을 맡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것들까지 바꾸고 이야기가 되게 각색을 하려 한다면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계모와 왕자같은 등뼈들을 놔두고 정치적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야기는 더 황당해집니다. [정치적으로 공정한 베드 타임 스토리]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왜 그 책이 우스꽝스러울까요? 바로 스토리와 설정이 '정치적 공정성'과 충돌하는 데에서 생기는 부조화 때문입니다. [베드 타임 스토리]야 원래 웃기려고 한 이야기지만, 진지하게 이런 짓을 한다면 비웃음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에버 애프터]한테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북]에 나오는 모범적인 내용만을 기대한다면, 그 친구처럼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영화의 제1목표는 정치적 공정성 교과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대적이고 활기찬 로맨스를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별점 평가에도 썼지만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목적에서 벗어나는 요소들은 잘라내는 것이 당연하죠.

2.

한 시대의 가치관이나 사상에 완벽하게 일치되는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한 가치관의 이데아라고 할 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억지로 그런 캐릭터를 만들거나 그 사상 체계에 맞추어 스토리 요소를 구성한다면 그 작품은 대못처럼 뻣뻣한 괴물이 되어버리고 말겠지요.

서툰 정치 예술가들은 종종 여기서 걸려 넘어집니다. 스탈린 시대와 히틀러 시대의 중류급 정치 예술품들을 보면 왜 그런 지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전함 뽀쫌낀]이나 [올림피아]와 같은 정치 영화의 걸작들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겠군요. 왜 그 영화들이 지금도 사람의 피를 끓게 할까요? 그들이 진정으로 다루는 것이 분노와 열광이지,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메시지만으로는 그럴싸한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좋은 정치 예술품들이 늘 자기 기만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예술품이건 그들의 제1목적은 자기 완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만드는 예술가가 이 생각에 찬성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요.

예술가들은 사기를 칩니다. 수용자들도 마찬가지죠. 종종 그 결과는 잔인해집니다. 심지어 비계산적이라고 여겨지는 르포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파의 카메라 앞에서 총맞아 죽어가는 공화국 병사를 보면서 우리가 전쟁의 참혹함만을 생각하겠습니까? 천만에요. 정반대입니다. 우리한테 가장 먼저 다가가는 것은 그 결정적 순간이 만들어낸 박진감입니다. 카파도 그 필름을 현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했겠죠. "와우, 죽이는군!"

3.

'지나치게 예쁜 드루 배리모어'라는 불만은 여기서 따로 다루어보기로 하죠. 일단 질문부터 하나 할게요. 여러분은 스크린 위에 여러분과 같은 아무개들이 나오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미셸 파이퍼나 윌 스미스가 나오기를 바랍니까?

적당히 타협적인 대답을 찾으려는 여러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리얼리즘 영화에는 보통 사람이, 대중적인 영화엔 헐리웃 스타가...') 하지만 전 그런 복잡한 답을 원한 게 아닙니다. 제가 준비한 답도 그에 못지 않게 간단하고요.

전 영화관에서 잘생긴 사람들을 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지요. 헐리웃이 자기네 진짜 삶을 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그런 삶 속의 보통 사람들 역으로 바라는 배우는 멕 라이언이나 줄리아 로버츠입니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보통'인 것입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우리가 마주치는 결과물은 그렇게까지 자연스럽지 않으며 꽤 짜증나는 구석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어요. 저는 사람들의 외모에 아주 집착하는 편이기 때문에 할 말도 많습니다) 화면에 잘생긴 사람이 나오는 것 자체는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잘생기지 않은 스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매력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잘생기지 않으면서도 인기가 높다면 그 사람은 뭔가 다른 것으로 부족한 외모를 보완하고 있다는 말이겠죠. 다시 말해 관객들이 우선적으로 보는 것은 주인공이나 배우의 매력이란 말입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공정한 생각이죠?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외모나 매력이 아니니까요. :-P

그러나 그런 공정성은 영화를 포함한 어떤 예술에도 먹히지 않습니다. 역시 많은 정치적 메시지 영화들이 여기서 걸려 넘어집니다.[개 같은 날의 오후]를 한 번 보죠. 전 이 영화를 꽤 좋게 봤지만, 손숙이 연기한 이혼녀 경숙이 연설을 할 때마다 짜증이 났습니다. 그 사람 하는 말의 내용 때문에? 천만에요. 경숙은 '옥상의 10인'의 브레인이므로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합니다.

하지만 경숙의 캐릭터가 너무너무 매력이 없고 심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뭘 이야기하건, 전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선경과 김보연이 연기한 윤희나 은주 엄마처럼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가득한데 왜 그 재미없는 사람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옳아서요? 웃기지 말라고 해요.

다시 드루 배리모어로 돌아가죠. 일단 이 캐릭터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흡인력은 필수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못생긴 캐릭터를 매력적이고 공감가는 인물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의 릴리 테일러는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러나 그 릴리 테일러도 추녀 분장 속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위해 시동 거는 시간과 수많은 변명이 필요했습니다. 헐리웃의 아름다운 사람들에 눈이 고정된 사람들한테 매력없는 외모의 주인공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면 여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 데에 시간을 낭비해야 합니까? 러닝타임이 그렇게 남아돕니까? [샌프란시스코의 하룻밤]이나 [뮤리엘의 웨딩]처럼 외모 자체가 중요한 주제인 영화가 아니라면 그런 여유는 부리지 않는 게 옳으면서 지당한 일입니다.

4.

MBC의 옴부즈맨 프로그램에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토론 주제로 다루어진 적 있습니다. 그 때 산더미처럼 쏟아지던 비평을 막으려고 그 PD가 사용하던 방패가 이런 것이었답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오락용이지, 다큐멘터리나 교양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술은 내숭을 떨 필요 없습니다. 그 PD가 조금 더 과격해서, 오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도 전 인정했을 겁니다. 오락은 그만큼이나 순수하고 중요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그 시리즈가 종종 뱉어대는 성차별적, 이성애적, 가부장적 편견에 욕설이 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과연 '정치적 공정성'과 '오락성(또는 예술성)'은 모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정한(이 뻣뻣한 표현이 싫다면 마음에 드는 뭔가 다른 걸로 바꾸어 넣으세요)' 예술이면서도 훌륭한 오락(예술)인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안토니아즈 라인]같은 작품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간단합니다. 그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가 '정치적으로 공정'하면 됩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그 예술가는 그 공정한 생각 안에서 자유로울 겁니다. '정치적 공정성'을 지향하는 풋내기들이 그 뻣뻣한 생각에 걸려 넘어지는 동안, 그 사람은 당연한 듯이 완성도와 관객들이 누릴 즐거움에 신경 쓸 수 있을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몇 년 마다 돌림병처럼 퍼지는 방송국들의 '공영성 지향' 운동이 바보같아 보이는 거죠. 그 사람들은 지금 최악의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도 뭔가 한다면서 문제 프로그램들을 갈아치우고 자기네가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들을 끼워넣고 있는 모양인데, 그게 될 리가 없죠. 원래 머리 속에 찬 게 꽝이니 그 '공영성'이 세상에 보탬이 될 리 없고 머리 속으로는 죽어라고 그 공영성의 검열을 받아야 하니, 쉽게 망가지는 인위적인 불구들밖에 만들어 낼 수 없는 겁니다. (9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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