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번역하기

2010.02.22 13:24

DJUNA 조회 수:2836

제목 번역하기

1.

아시다시피 이 페이지는 개인적인 곳이므로 전 꼭 개봉되거나 출시된 영화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외국 비디오로 보았거나 아니면 AFKN이나 다른 외국어 방송으로 본 영화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죠.

그런데 영화들의 제목을 옮기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을 때가 있습니다. [The Getting of Wisdom], [The Thin Man], [All Over Me],[Leave Her to Heaven]과 같은 영화 제목들을 보세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요? 사실 아직까지 이 영화들의 소개글을 올리지 않는 것도 순전히 제목 탓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영어 제목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하는 수입업자들을 비난하곤 합니다만 요샌 전 점점 그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양반들을 한 번 변호해 보기로 하겠어요.

2.

얼마 전에 조선일보의 문화란에서 영화 제목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벅'스 라이프]와 같이 외국어 표기를 그대로 쓴 영화들을 비난하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와 같이 충실하게 제목이 번역된 영화들을 칭찬했습니다.

뭐 우리 나라말로 잘 옮긴 제목이 있다면 좋은 일이긴 하죠. 충분히 번역될 수 있으면서도 꼭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역시 문제고요. 하지만 이 양반은 기사를 쓰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번역된 결과만 잽싸게 보았을 뿐 그 과정이 어땠을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제목이란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많은 제목들이 축약된 상태거나 중간에서 잘려있거나 원래 언어의 관용어들이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게다가 각 언어마다 제목을 만드는 데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습니다. 제목을 번역하려면 의미만 번역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모양새까지 갖추어야 해요.

번역이 곤란한 예를 하나 들어보죠. [클루리스 Clueless]는 어때요? 대충 '대책없는' 쯤으로 번역되는 제목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 감각에 따르면 '대책없는'만으로는 제목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책없는'은 [Clueless]란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이 은어의 경박함도 살리지 못합니다. 이런 것에 제목을 붙이느라고 애를 먹느니 한 단어밖에 안되고 기억도 쉬운 [클루리스]를 그냥 쓰는 게 낫죠.

[오픈 유어 아이즈]는 또 어떤가요?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Abre Los Ojos]니까 [오픈 유어 아이즈]는 영어 번역을 가져온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 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눈을 떠라]? 뭔가 단어 하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또 지나치게 강압적입니다. 조금 길게 해서 [눈을 뜨세요]는 어떨까요? 이번에는 너무 간지럽군요. 원래 제목이 가지고 있는 중성적인 느낌을 얻으려면 우리 말로는 힘이 듭니다. 수입업자들이 영어 제목을 쓴 것도 당연하죠.

조선 일보의 순진한 기자 양반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 말로 번역된 제목들은 수입업자가 외국어 표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우리말 사랑을 실천한 결과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까 제목이 번역하기 쉬웠던 거죠.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를 보세요. 온전한 한 문장이고 관용어도 중의적 표현도 없습니다. 그냥 번역만 하면 되는 거예요. 게다가 제목이 상당히 기니 원어로 그대로 표기했다간 황당해집니다. 발음을 그대로 쓰면 [아이 노우 왓 유 디드 라스트 서머]가 되는 제목입니다. 이게 과연 유혹이나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도 마찬가지예요. [As Good As It Gets]은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만큼 말끔하게 번역되는 제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즈 굿 애즈 잇 겟]을 제목으로 삼는 것보다는 약간 여유를 부려 우리 말로 번역하는 게 낫습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네가...]는 우리말 사랑의 결과가 아닙니다. 단지 어쩌다 번역이 원제 발음 표기보다 쉬웠던 행운아들일 뿐입니다.

3.

원어로 표기하는 것 역시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저는[The Haunting]에 대한 글에서 제목 표기가 얼마나 귀찮은 것인지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모든 영어 단어들이 그대로 표기 대상에 올라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습니다. 중학교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 수준의 단어로만 구성되어야 하며 자연스럽게 우리식 발음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길어서도 안되고 정관사나 복수의 's'같은 건 지워주어야죠. 결코 생각없는 해결책은 아니고 또 쉽지도 않습니다.

[The Thin Red Line]을 [씬 레드 라인]으로 표기할 때까지 그 쪽 사람들도 꽤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영어에서는 형용사 두 개를 나란히 이으면 되는 제목이지만 우리 말로는 안됩니다. [가늘고 붉은 선]쯤으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고'로 연결되는 제목은 원제가 가진 압축성이 떨어지고 또 우리 식 제목과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래 표기를 그대로 옮기자니 Thin의 'th' 발음이 문제가 됩니다. 이 발음은 우리 말에는 없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결국 [씬 레드 라인]으로 정착되었지만 다들 조금씩 불편했을 겁니다. 여전히 어색하거든요.

4.

번역이 어렵고 또 원어 표기도 힘들다면 아주 우리 식으로 제목을 만드는 법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그렇게 개작 제목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죠. 그네들의 단순한 표기법으로는 영어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 외국어 발음 표기 제목이 많은 것은 한글의 표기법이 그만큼 세련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하여간 저는 못할 일입니다. 수입업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정식 수입업자들이 머리를 좀 잘 굴리면 꽤 멋진 제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아름다운 비행]입니다. 이 영화의 원제인 [Fly Away Home]는 영어 관용어라 번역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제목을 그대로 번역해서 쓴 나라는 거의 없어요(독일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에이미와 아기 기러기들]이었고 일본에서는 그냥 [구즈]였습니다.) 발음표기를 그대로 옮겨와 쓰자니 모양이 안 좋고요.

[아름다운 비행]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좋은 선택이죠? [구즈]나 [에이미와 아기 기러기들]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영화의 내용과도 잘 맞고요.

그러나 이런 제목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제목 만드는 것도 시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죠.

요새 우리 말로 다시 지어진 제목들을 들여다 보면 상당수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At First Sight]의 우리말 제목 [사랑이 머무는 풍경]이나 [Cruel Intentions]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완전 실패작입니다.

우리말 제목이라고 그냥 칭찬만 할 게 아닙니다. 우선 이 제목들은 영화 내용이나 분위기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셀린 디옹 노래 가사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글자들의 나열일 뿐입니다. 너무 진부해서 기억하기도 어렵지요.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제목들이 기억이 안나서 두 번이나 하이텔을 뒤적거렸다는 게 아닙니까! 이 제목들에 장점이 있다면 우리말 썼다고 기자들의 칭찬을 받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밥 먹여줍니까?

5.

모든 외국어 표기 제목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잉글리시 페이션트]나 [센스, 센서빌리티][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와 같은 제목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두 우리말로 쉽게 번역되는 제목입니다. [센스, 센서빌리티]의 경우 [분별과 다감]이나 [이성과 감성]과 같이 오래 전부터 쓰여왔던 제목이 있었고요. 이런 영화 제목들이 실패작이었다는 건 확인하려면 아무 영퀴방에 들어가보세요.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같은 제목은 공식적인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퀴방에서 이 영화를 문제로 내면 다들 [영국인 환자]라고 하지 [잉글리시 페이션트]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목 짓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아달라는 말입니다. 당사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비판이 겉핥기라면 비틀린 외국어 표기 제목 생산에 아무런 영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하기 쉬운 것이 비판이지만 정작 진짜 비판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건 꼭 외국 영화 제목 비판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랍니다.

6.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 고민도 좀 해결해 주시죠. 앞에서 예를 든 제목들 기억하세요?

가장 만만해 보이는 [Leave Her to Heaven]부터 고민해보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충 번역하면 [그녀를 천국에 맡겨라] 쯤 됩니다. 명령어가 불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문장이 되지요.

하지만 이 문장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불안해집니다. 이 제목은 [햄릿]의 햄릿 부왕의 대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네 숙부에게 복수를 하되 네 엄마까지 벌하지는 말아라' 쯤 됩니다. 그렇다면 [그녀를 천국에 맡겨라]는 원래의 의미를 상실한 지나치게 단순한 제목이 아닐까요?

[The Thin Man]은 어떨까요? [깡마른 사나이]나 [마른 남자], [말라깽이 남자]쯤이 될텐데, 우리말의 기준으로 보면 이 모두가 제목이 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원래 표기를 쓰자니 'Thin'의 'th'발음이 거슬리고요. '씬 맨'은 원래 의미도 안 사는 것 같죠? 이 제목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The Getting of Wisdom]은 어때요? 이 제목은 성경 귀절을 중간에서 뭉텅 자른 것입니다. 아마 잠언에서 잘라 온 것 같은데 이 잘린 도막을 멀쩡한 모양으로 번역하자니 힘이 드는군요. [게팅 오브 위즈덤]이라고 그냥 쓰자니 '게팅'이란 단어가 모양이 안 좋고요.

역시 관용어를 이용한 제목인 [All Over Me]는 정말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그냥 [올 오버 미]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다른 대안이 있을까요? (9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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