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프리 보가트의 핑크색 얼굴

2010.02.22 11:15

DJUNA 조회 수:1701

얼마 전에 캐치원에서는 '밀레니엄 특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필름 느와르 고전들을 방영했습니다. 밀레니엄과 필름 느와르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지 전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영작들은 좋았죠. 특히 [말타의 매]나 [빅 슬립]과 같은 영화들은 국내에서 정식으로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작품이라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영화를 칼라로 방영했답니다! 다시 말해 컴퓨터로 색을 입힌 버전이란 말이죠. 그것도 별로 잘 입힌 것도 아니었어요. 험프리 보가트의 핑크색 얼굴과 색종이 같은 파란 옷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나더군요.

그래서 하이텔 캐치원 게시판에 들어 항의를 했죠. 좀 기다리다보니 대충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어요.

"흑백과 컬러 두가지 버전 중 굳이 컬러버전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좀 더 대중적인 취향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말타의 매]와 [빅 슬립]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느와르의 고전들은 오래된 흑백영화를 선호하지 않는 보다 많은 분들에게는 흑백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컬러버전을 선택했습니다.

최근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흑백 고전명작 영화들에 컬러를 입힌 버전으로 재개봉하거나 재출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치겠더군요. 어차피 같은 소릴 다시 하면 양쪽 다 속이 상할 뿐이라 다시 따지는 짓을 하지 않았지만 영화 채널이라는 것을 돌리는 사람들의 머리가 겨우 이 정도 밖에 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칩니다.

생각해보죠. [말타의 매]를 방영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양반들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시청자들은 누구일까요? "뭐야, 컬러가 아니잖아!"라고 채널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단 [말타의 매]가 '잘 알려지지 않은 흑백 영화'라는 것보다 훨씬 그 영화에 대해 알고 있고 또 잘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합니다.

칼라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끝에 단 것도 옳지 못합니다. 미국이라면 컴퓨터 컬러화는 옵션을 늘려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비디오나 다른 방송국의 방영물로 흑백판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 사람들은 중간업자의 부당한 귄리를 휘두르며 시청자들을 과보호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흑백 영화를 싫어하지만 [말타의 매]를 보고 싶어했었을 그 드문 시청자들도 이득 본 건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칼라가 형편없거든요. 게다가 다양한 매체로 부터 이미지 교육을 받아온 요즘 세대들은 흑백에 별다른 무리없이 적응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돌리는 곳은 소위 영화 전문 채널이라는 곳이 아닌가요? 현대 방송과 같은 곳이라면 저흰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대상에 최소한의 신경을 써주는 것이 의무입니다.

대안? 텔레비전 화면을 흑백으로 만들어 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칼라화 과정이 원래의 흑백 화면에 화면 손상을 일으키는 건지 아닌 지는 모르지만, 만약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 흉측한 핑크색은 피할 수 있으니 그래도 옵션이 생겼다고 할 수 있죠.

이 정도면 마음이 대충 풀려야 하지만 그렇지가 않군요. 그건 아직까지 영화에 대한 기초적인 사랑도 없는 중간업자들이 병목에 서서 친절한 척 하는 모습이 참으로 꼴보기가 싫기 때문입니다(전에 이 사람들이 저질렀었던 엔드 크레딧 끊어먹기가 또 생각나네요.) 이런 사람들에게 대처할 방법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아서 더 싫고요.

덧붙임 AFI가 만든 로버트 와이즈의 사이트에 캐치원 양반들이 한 번 들어볼 만한 기사가 실려 있더군요. 와이즈의 고전적인 호러 영화인 [The Haunting]에 칼라를 입히려는 시도가 수많은 영화인들의 항의로 저지되었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슬슬 정신을 차리고 있나 봅니다. (99/02/26)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험프리 보가트의 핑크색 얼굴 [1] DJUNA 2010.02.22 170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