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무현이 은주에게 알 약 두 개를 내밀고 있군요. 분명히 먹긴 먹을텐데 증상에 별 도움은 안되는 모양이지요?

듀나 은주가 애들이 오면서부터 집에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남편에게 호소하고 있군요. 근데, 이 사람, 저번과는 달리 지금 남편에게 반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가끔 이 둘을 섞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이 경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 여기에 수미의 목소리가 섞였다고 믿고 싶어요. 이날 저녁까지 수미에게 '은주'는 일종의 '연기'였지만, 싱크대 귀신이 나온 뒤로 완전히 은주의 역할에 빨려든 것이죠.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의 영향도 있었을 거고요.

파프리카 안방에서 나온 무현은 싱크대로 갑니다. 그러는 동안 은주는 거의 다리오 아르젠토 식으로 시뻘건 원색의 배경 속을 걸어다니고요. 왜 [장화, 홍련]을 언급하며 [서스피리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걸까요? 아르젠토식 피투성이 학살은 없지만 이 영화의 과격한 색조 구성은 분명 아르젠토에게 빚을 지고 있어요.

듀나 그리고 무현은 은주의 새장 속에 새가 한 마리 죽어 있는 걸 발견합니다. 새의 시체는 한마리밖에 없어요. 왜 시체를 하나만 남겨두었는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수미의 정신은 서서히 일관성과 논리를 잃고 있다고요. 수연의 침대 속에 새를 집어넣는 일은 수미도, 수연도, 은주도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지요.

파프리카 남편이 새의 시체를 치우는 걸 은주가 목격합니다. 이 장면의 갑작스러운 클로즈업과 음향 효과는 너무 뻔한 공포영화식이라 오히려 맥이 풀리는군요.

듀나 "이것들이 그냥!" 화가 난 은주는 수연의 방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왜 은주는 수연에게 달려가는 걸까요? 자신의 진짜 상대가 수미라는 건 너무나도 분명한데? 아마 은주/수미의 흐릿한 정신 속에서는 그런 논리적 생각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게다가 지금 수미의 머리 속은 '수연을 학대하는 은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수연에 대한 수미의 걱정이, 수미가 연기하는 은주에게 수연을 학대하도록 부추키는 것입니다.

은주는 잠긴 문을 열고 수연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방 안에는 자기 얼굴을 모조리 뜯어낸 사진들로 가득 하죠. 찢어진 얼굴들에는 모두 검은 칠이 되어 있고요. 분노한 은주는 자고 있는 수연을 침대에서 끌어냅니다. 반항하며 울부짖던 아이는 결국 옷장 안에 갇혀버리고 말아요. 네, 드디어 옷장이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에필로그의 단순한 사고는 악의적이고 과격하게 변주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주제가 맨 뒤에 놓여있는 변주곡과 같아요. 중요한 거의 모든 사건들이 에필로그에서 일어난 짧은 사건의 변주지요.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은주는 수연에게 을러댑니다. 이 장면의 염정아는 정말 무서워요. 저 끝이 올라간 눈은 CG로 처리한 것이던가요? 하여간 이 장면에서 염정아는 깜장 귀신이나 싱크대 귀신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은주의 이런 행동이 이치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면상의 논리는 있어요. 아이들이 아끼던 새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아직 자리도 불안정한 후처가 전처의 딸에게 이런 식의 폭행을 가하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것도 남편이 집에 있는 동안에 말이에요. 이 정도 선에서 관객들은 은주가 드디어 미쳤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눈 앞에서 일어나는 공공연한 학대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합니다.

이런 부조리함은 영화의 체감 속도와도 연결됩니다. 많은 관객들은 [장화, 홍련]의 초반 페이스가 느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체감 속도는 두번째 감상 이후엔 극적으로 바뀝니다. 모든 게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것이죠. 첫번째 감상 때 영화가 느리게 느껴졌던 건 이 부조리함을 관객들이 꿰어 맞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익숙한 길에서 늘 일부러 살짝 벗어나는 미로와 같은 구조를 하고 있거든요. 이건 마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갈 때는 같은 시간을 걸어도 더 멀고 길게 느껴지는 것과 같아요.

파프리카 은주는 잠시 옷장 문을 열지만 수연의 울먹이는 모습에 다시 화가 나서 문을 걸어잠급니다. 이 장면에 흐르는 건 이병우의 서글픈 음악입니다. 스크린 위에 벌어지는 과격한 학대와 배경음악의 서정성은 아주 이상한 불균형을 초래하지요. 김지운은 이 선택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결과는 정말로 좋습니다. 내용상으로도 맞고요. 우리가 보는 이 끔찍한 일이 사실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한 소녀가 환각 속에서 벌이는 연극이라는 걸 생각해보세요. 무섭지만 슬픈 장면이에요.

듀나 은주가 나가고 수미가 깨어납니다.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춘 인격 전환이지요.

은주의 그림자가 아래층으로 사라지자 수미는 수연의 방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수연이 끌려가면서 넘어뜨린 등이 잠옷입은 수미의 모습에 가는 실루엣을 만들어줍니다.

수미는 옷장 문을 열고 갇혀있던 수연을 끌어안습니다. 이 장면도 정상은 아니지요. 보통 이럴 때는 갇혀있던 동생의 얼굴을 먼저 보여주고 그 다음에 위로 장면이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위로 장면이 한참 진행될 때까지 수미의 모습만 보여져요.

"미안해 수연아,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라고 수미는 말합니다. 이 장면 역시 제의적입니다. 수미는 이번에도 수연 곁에 없었어요. 어떻게든 수미는 수연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그게 가능합니다.

그 뒤에 우린 수미에게 안겨 울먹이는 수연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표정은 보통 관객들이 이런 설정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뭔가 더 있는데 그 의미를 쉽게 읽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눈빛이지요.

파프리카 그러는 동안 무현은 열심히 죽은 새를 묻고 있습니다. 방 안에는 돌아다니는 여자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물론 그 집엔 수미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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