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다시 날이 밝았네요.

듀나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 영화의 가장 모험적인 이야기 전개가 시작됩니다.

자, 이런 것이죠. 관객들은 드디어 수연이 오래 전에 죽었고 지금까지 나왔던 건 수미의 환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아직 많은 것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수연이 어떻게 죽었고 그 죽음이 지금까지 일어난 초자연현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연을 봤던 사람은 수미뿐만이 아닙니다. 은주도 봤어요. 그냥 본 정도가 아니라 학대까지 했지요. 그렇다면 은주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노련한 장르 관객들이라면 이 설정에 맞는 답들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정답을 맞추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요. 그러나 여기서 문제점은 진상이 쉬우냐, 어려우냐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해설을 기대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김지운은 그 뒤를 해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시퀀스는 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그랑 기뇰식 제의입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에요. 하지만 첫번째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인 설명을 찾느라 그 체험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 시퀀스는 두번째 감상 때 훨씬 낫게 보입니다.

파프리카 은주가 피에 젖은 자루를 끌고가면서 다음 시퀀스가 시작됩니다. 은주의 첫 맨발 장면인가요? 이전까지만 해도 은주는 늘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요.

듀나 첫날 밤 침대 장면에서 맨발이 한 번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걷는 장면에서는 분명 처음인 듯 해요.

파프리카 은주는 부지깽이로 자루를 내려칩니다. 이 자루의 모티브는 아주 익숙한데요.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 [오디션]이 떠오르지 않나요? 그 영화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여기서만큼이나 불길한 자루가 등장하니까요.

듀나 [장화, 홍련]은 인용이 참 많은 영화지요. 어떻게 보면 "난 이런 영화들을 봤다!"라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긴 시작부터 남들이 미리 한 걸 흉내내는 게 장르물의 운명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인용이라는 것을 정정당당하게 인정한다면 이건 상당히 좋은 인용입니다. [장화, 홍련]의 자루는 [오디션]보다 오히려 정서적 울림이 훨씬 더 크거든요. [오디션]에서 자루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일뿐이지만, [장화, 홍련]에서 자루는 사라진 동생을 구출하려는 언니의 절실한 감정과 공포를 함께 담고 있지요. [오디션]에서 자루가 불길한 조연이라면, [장화, 홍련]에서 자루는 당당한 주연입니다.

파프리카 은주는 수미와 다른 방식으로 자루를 보고 있습니다. 자루는 없애고 싶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이지요. 수미는 은주의 시점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점에서도 자루를 보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고 싶다는 건 수미의 갈망이기도 하지요. 말하는 것을 잊었는데, 수미는 가끔 이런 식의 인격 분열을 아주 편리하게 쓰고 있습니다. '사악한' 은주는 수미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줍니다. 반대로 '천사같은 동생' 수연은 종종 수미에게 양심의 역할을 해주지요.

부지깽이로 자루를 내리치는 순간, 수미는 그 끔찍한 날 일어났던 일들의 단편들을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납니다.

수미는 일어나 아빠가 문틈에 밀어넣어 둔 쪽지를 읽습니다. 아마 이 DVD를 산 외국 사람들은 조금 짜증날 거예요. 영어자막이 쪽지를 번역 안해주고 있거든요. 잠시 외출했다가 오후에 들어올 거라는 말에 불과하지만요.

듀나 수미는 자동적으로 수연의 방으로 달려갑니다. 어제 수연이 죽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않았냐고요? 물론 관객들도 압니다. 수미도 그 지식은 갖추고 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수미를 부르고 있고 수미 역시 그런 수연을 구출하려 하고 있지요. 이 비논리적인 속성이 이 시퀀스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진상의 해설만 기대하는 관객들은 이 점을 쉽게 놓치지요.

파프리카 수연의 방문에는 못이 박혀 있습니다. 이건 순수한 꿈이 아닙니다. 나중에 진짜 은주가 나오는 '현실' 장면에 뜯겨진 못이 보이니까요. 그렇다면 수연의 방에 수미가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 무현이 한 일일까요? 그렇다면 왜 나중에는 그 못이 뜯겨 있을까요? 수미는 문을 열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혹시 처음부터 그렇게 못이 박혀 있었던 건 아닐까요? 수연의 문을 열려는 은주의 행동은 문에 박힌 못을 뜯는 수미의 행동이 수미의 머리 속에서 변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수미가 첫날 수연의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발견하는 삭제 장면이 처음부터 없다고 무시하면 말이에요. 이 영화에서 이치에 닿는 일관된 해석을 끌어내려면 정말 수많은 타협을 거쳐야 합니다!

듀나 수미는 1층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언니..."하고 수연이 부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노골적인 광기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수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다가 무언가 피에 젖은 것이 질질 끌려간 흔적을 발견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맨발에 하얀 잠옷을 입고 겁에 잔뜩 질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복도를 따라가는 수미는 정말 이상적인 공포영화 주인공의 모습이 아닌가요?

공포영화 버전 엄지동이처럼 수미는 핏자국을 따라갑니다. 전 이런 식으로 단순한 동화적 속성이 공포영화의 관습과 결합되는 설정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파프리카 드디어 수미는 자루를 발견합니다. 겁에 질려 더듬더듬 자루를 만지던 수미는 필사적으로 입구를 죄고 있는 끈을 풀려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공포와 짜증, 다급함이 뒤섞인 수미의 정신은 드디어 임계점밖으로 날아가버립니다.

김지운이나 임수정이나 모두 이 장면이 불만인 모양입니다. 그 불만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입니다. 전에 찍었다가 필름 사고로 날려버린 게 훨씬 좋았다는 거지요. 전 안봤으니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사라진 원본을 잊는다면 최종 결과는 굉장히 좋습니다. 임수정의 처절한 연기도 이 이상 강렬할 수 없을 것 같고요. 정말 원본이 궁금해질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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