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병원입니다. 코멘터리에 나오는 문근영의 감상이 인상적이군요. "내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지요. 살아서 언니를 위로해 주어야 하는 건데... 흑흑...

듀나 은주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염정아의 진짜 은주 연기는 수미/은주의 연기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지요. 수미/은주는 과장된 캐리커처거나 공포 영화의 악당이지만 진짜 은주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은주는 수미의 병실로 들어가 수미를 위로합니다. 이건 진심일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고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가려는 자기의 손목을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수미에게서 달아나려는 은주의 필사적인 행동 역시 진실입니다. 은주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수미에게 끌려갈 생각은 없지요.

은주는 무현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병실에 남은 수미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합니다. 여기서부터 회상 장면들로 구성된 에필로그의 첫번째 도막이 시작되지요.

파프리카 그네를 타는 수연의 발이 보이고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은주와 무현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서 우린 처음으로 객관적인 시점에서 수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근영이 연기하는 수연은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수연과 조금 다릅니다. 덜 귀엽게 굴고있고 보다 속이 찬 진짜 아이처럼 보이지요.

남편과 남편의 여자가 오는 소리를 듣는 아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 이 사람의 병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일 겁니다. 자살도 아마 그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 병이 수미에게 유전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듀나 다시 현재. 집으로 돌아온 진짜 은주는 식탁 앞에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파프리카 다시 회상. 은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미는 식사 도중 나갑니다. 왜 왔는지도 모르지만 선규와 미희의 모습도 보이네요. 은주는 수연이 먹던 죽을 빼앗아 싱크대에 버립니다. 여기서 우린 수연이 달고 있던 머리핀을 볼 수 있어요. 이 장면 다음에 아마 삭제된 실랑이 장면이 삽입되었던 모양이에요. 네, 저도 이 장면은 살리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이야기가 되니까요. 하여간 갑자기 머리핀을 잃은 수연은 자기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서 쓰러집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엄마가 위로하러 오는군요. 엄마의 얼굴도 반쯤 머리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 집 여자들은 정말 답답하지 않을까요?

듀나 다시 수미의 병실.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립니다. 수미는 "수연아"라고 말합니다. 수연은 유령이 되어서야 휘파람을 마스터했던 모양이죠?

휘파람 소리는 집에 돌아온 은주에게도 들립니다. 갑자기 집에 발자국 소리도 들리는군요. 은주는 휘파람과 발자국 소리를 찾아 2층으로 올라갑니다. 은주가 밟는 마루판자 사이에서 피가 올라오고요.

은주는 수연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못이 박힌 나무토막은 뜯겨져 바닥에 뒹굴고 있어요. 방은 춥습니다. 은주의 입에서는 입김이 나오네요. 요샌 그냥 컴퓨터 그래픽으로 입김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재래식 방법을 썼군요. 방의 온도를 영하로 낮추었답니다.

은주는 커튼을 열고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방의 다른 부분을 보여줍니다. 빈 액자들이 가득하군요.

파프리카 김지운은 또 가족 상징 이야기를 하는데, 전 그냥 필요이상으로 노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듀나 불이 꺼지고 은주는 겁에 질려 옷장으로 가 문을 엽니다. 이불 밑에 뭔가가 있어서 잡아당기는군요. 초록 귀신이 기어나오고 은주는 비명을 지릅니다. 물론 그 초록 귀신은 수연입니다. 초록 드레스를 입은 수연의 사진이 깨지고 사건 당시 그 옷장엔 수연의 초록 드레스가 걸려 있었으니까요. 삭제된 장면에서는 정말 수연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불만이에요. 사족같다는 느낌이 들죠. 집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숨어있다는 정보를 주고 은주에게도 무언가 역할을 제공해주려는 김지운의 의도는 알겠는데, 그래도 이 방법은 그렇게까지 옳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은주에게 무언가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 이건 두 사람의 죄와 실수에 대한 이야기이니 수미만 고통을 겪어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그냥 "무서운 유령을 만나 고함을 지른다"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겠어요? 차라리 그냥 비명을 질러대는 대신 은주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초자연적인 요소를 그대로 남겨둔다고 해도 결말이 훨씬 만족스러웠을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공포영화 장르의 관습적 해결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나쁜 계모가 당했다는 거지요. 아무리 김지운이 처벌 의미가 없다고 주장해도 다르게 볼 수 없지 않겠어요?

파프리카 그리고 무현은요? 왜 무현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이 모든 일들이 자기 때문에 일어났는데?

듀나 뭐, 자기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루어질 필요가 없어요. 왜냐고요?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런 영화에서 수난의 자격은 주인공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무현은 이 영화에서 가부장적 시스템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도구에 불과하지요. 그는 관객들이 보지 않는 데서 혼자 평범하게 고통받으면 됩니다.

파프리카 저는 시간이 좀 이상하다는 걸 지적하고 싶군요. 수미가 휘파람 소리를 듣는 건 낮입니다. 하지만 은주가 초록 귀신을 만나는 건 밤이지요. 그 다음에 수미가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는 장면은 다시 낮이네요. 이들이 꼭 같은 시간을 공유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좀 어색한 건 사실이에요.

듀나 전 여기서 수미의 모든 드라마가 끝난다는 게 불만이랍니다. 에필로그에 상당히 강렬한 엔딩이 남아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래도 연대기 순의 결말 역시 존재해야 합니다. 김지운은 수미의 자살 장면을 찍었다가 너무 상투적으로 보일까봐 지워버렸고, 수미가 병원에서도 수연의 환상을 보는 장면을 찍었다가 그 역시 너무 신파라서 지워버렸다는데, 자살이나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족스러운 결말을 하나 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감하며 따라갔던 주인공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여기서 결말을 주지 않으면 이 영화는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직전에 주저앉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잘라서 영화의 후반부가 덜 산만해지나? 그것도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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