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잡담

2010.03.05 10:01

DJUNA 조회 수:2084

1. 중계

올해 아카데미 상 중계는 HBO에서 다시 OCN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리쇼 진행도 수록되었고 진행자가 세 명으로 늘었었죠. 수상자 소감을 자막으로 처리한 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진행자들의 수준은 최악이었습니다. 우선 쇼의 형식과 개념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이 갈팡질팡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인 메모리엄'과 같은 고정된 섹션을 몰라 상대방에게 물어보는 정도라면 중계 진행자로서는 실격이라고 해야겠지요.

생방송 도중 발생한 실수도 대부분 지식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콩골드의 [시호크]를 [이티] 음악으로 착각하고, 엄연히 우디 앨런이 노라 에프론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뉴욕 관련 클립 앞에 '노라 에프론 필름' 타이틀이 뜨는 데도 노라 에프론의 이름이 왜 나왔는지 모른다면 단순히 실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 나쁜 건 이번 진행자들의 능력 부족이 멘트의 양과 꼭 비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딱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시청자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자기네들이 모른다면 역시 말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렇지 않아도 전달이 안되는 동시 통역 위에 또 자기 멘트를 덮을 필요는 없죠. 중계에서 중요한 건 쇼 자체를 간섭없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왜 다들 잊는 걸까요?

덤으로 말하자면 동시 통역은 한계가 보였습니다. 자막으로 일관하는 게 모두에게 좋을 듯 합니다. 적어도 번역이 엉망이란 걸 알고 영어 히어링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차선책을 선택할 수 있을테니까요.

2. 수상 결과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그래도 참고하실 분들을 위해 수상작 리스트를 여기 올려놓습니다. 알파벳 순서입니다.

ACTOR -- LEADING 
Denzel Washington
TRAINING DAY

ACTOR -- SUPPORTING
Jim Broadbent
IRIS

ACTRESS -- LEADING
Halle Berry
MONSTERS BALL

ACTRESS -- SUPPORTING
Jennifer Connelly
A BEAUTIFUL MIND

ANIMATED FEATURE FILM
SHREK
Aron Warner

ART DIRECTION
MOULIN ROUGE
Catherine Martin (Art Direction) and Brigitte Broch (Set Decoration)

CINEMATOGRAPHY
LORD OF THE RINGS
Andrew Lesnie

COSTUME DESIGN
MOULIN ROUGE
Catherine Martin and Angus Strathie

DIRECTING
A BEAUTIFUL MIND
Ron Howard

DOCUMENTARY FEATURE
MURDER ON A SUNDAY MORNING
Jean-Xavier de Lestrade
and Denis Poncet

DOCUMENTARY SHORT
THOTH
Sarah Kernochan and Lynn Appelle

FILM EDITING
BLACK HAWK DOWN
Pietro Scalia

FOREIGN LANGUAGE FILM
NO MAN'S LAND
Bosnia & Herzegovina
Directed by Danis Tanovic

MAKEUP
LORD OF THE RINGS
Peter Owen and
Richard Taylor

MUSIC (SCORE)
LORD OF THE RINGS
Howard Shore

MUSIC (SONG)
MONSTERS, INC.
"If I Didn't Have You"
Music and Lyric by Randy Newman

BEST PICTURE
A BEAUTIFUL MIND
Brian Grazer and Ron Howard

SHORT FILM -- ANIMATED
FOR THE BIRDS
Ralph Eggleston

SHORT FILM -- LIVE ACTION
THE ACCOUNTANT
Ray McKinnon and Lisa Blount

SOUND
BLACK HAWK DOWN
Michael Minkler, Myron Nettinga and Chris Munro

SOUND EDITING
PEARL HARBOR
George Watters II and Christopher Boyes

VISUAL EFFECTS
THE LORD OF THE RINGS
Jim Rygiel, Randall William Cook, Richard Taylor and Mark Stetson

WRITING (ADAPTED)
A BEAUTIFUL MIND
Written by Akiva Goldsman

WRITING (ORIGINAL)
GOSFORD PARK
Written by Julian Fellowes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이 발표되기 전부터 사람들이 의견 일치를 봤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수상작을 예측하기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는 거였죠.

그러나 결과를 보면 대충 예상대로 흘러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예측이 어렵다고 예상한 것 때문에 잘못 찍은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올해 예측 중 가장 빗나간 것은 이번 수상식 결과가 예측 불허일 거라는 예측 자체였습니다.

하나 하나 따져보죠. [뷰티풀 마인드]가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 여우조연상을 탈 거라는 건 골든 글로브 수상식 이후 거의 확실했습니다. 적어도 여우조연상과 각색상은 다들 100 퍼센트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결과도 일치했습니다. 작품상과 감독상의 수상 가능성은 내쉬의 숨겨진 삶에 대한 루머나 로비에 관련된 추문으로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지만 결과를 보면 그렇게 상처가 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러셀 크로우의 경우 최근 일어났던 영국 아카데미 스캔들과 작년 수상자라는 핸디캡이 낙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 같군요.

[반지의 제왕]과 [물랑 루즈]도 꼭 받을 것 같은 상만 받았습니다. 아무리 인터넷 팬들이 작품상을 주라고 울부짖어도 [반지의 제왕]이 기술상만 받아 챙길 거라는 건 다들 짐작하고 있었죠. (덤으로 작곡상도 받았지만 이것도 그렇게까지 의외는 아니었습니다.) [물랑 루즈]가 미술 관련상을 휩쓸 거라는 것 역시 분명했고요. 약간의 예외가 있었어도 좋았겠지만 특별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블랙 호크 다운]과 [진주만]의 음향/편집 관련상 수상 역시 교과서적인 결과였고요.

남녀주연상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로저 이버트는 두 배우 모두에게 상이 돌아갈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수상 결과가 놀라웠던 건 남녀 주연상 모두가 흑인 배우들에게 돌아갔다는 것 자체였지 개별 배우들에게 상이 돌아갔다는 건 아닌 듯 합니다. 적어도 이들의 수상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까요.

많이들 이언 맥켈런이 남우조연상을 받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모양입니다만 전 짐 브로드벤트가 정당한 수상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리스]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이번 시즌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고스포드 파크]의 각본상, [쉬렉]의 애니메이션 부분상, [새들을 위하여]의 단편 애니메이션 부분 수상 역시 예상된 결과였습니다. 외국어 상을 받은 [노 맨즈 랜드]는 [아멜리에]와 아슬아슬한 경합을 벌였을 겁니다. 아마 9.11 이후 회원들이 진지한 전쟁 영화 쪽을 택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랜디 뉴먼의 주제가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하긴 그 양반도 상을 탈 때가 되기는 했죠.

3. 흑인 열풍

올해 아카데미 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흑인 열풍이 강했습니다. 시작부터 그랬지요. 주연상 후보로 자그만치 세 명이나 되는 흑인 배우들이 후보로 올랐고, 진행자 우피 골드버그 역시 흑인이었으며, 전설적인 흑인 배우 시드니 프와티에에게 공로상이 돌아갈 예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건 이것이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세 명의 배우들이 후보로 올랐던 두 부분 모두가 흑인 배우들에게 돌아갔으니 거의 완벽한 승리라고 해야겠지요.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카데미 회원들이 갑자기 정치적이 되어 두 배우 모두에게 상을 주기로 작정했던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상은 위원회가 아닌 개별 회원들의 투표수에 의해 결정되니까요. 다시 말해 그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영향을 통합해서 의식적인 결과로 끌어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외부의 영향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었지요. 올해만큼 인종 이슈가 적극적인 오스카 로비의 무기로 등장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영화사는 당연하다는 듯 아카데미상이 지금까지 벌인 인종 차별에 대한 죄책감을 노골적으로 자극했습니다.

이번 오스카 결과는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결합해 터진 결과였습니다. 할리 베리와 댄젤 워싱턴은 모두 인종과 무관하게 인기있는 스타였습니다. 두 사람이 출연한 작품들은 특별히 정치적이거나 설교적인 영화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연기를 사심없이 감상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두 영화 모두 배우 중심이었고요. 여기에다가 지금까지 서서히 성장한 할리우드의 흑인 세력의 압력과 인종 이슈에 대한 죄책감이 결합되면? 짜잔! 두 명의 흑인 주연상 수상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74회 아카데미상은 기념할만한 행사였습니다. 베리와 워싱턴의 수상은 아카데미의 인종벽에 상당히 큰 구멍을 냈습니다. 이 구멍이 다시 좁아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흐름이 역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요.

4. 기타 등등

우피 골드버그의 진행은 지금까지 그 사람이 한 것들 중 가장 좋았습니다. 아마 올해의 흑인 열풍이 영향을 끼쳤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OCN 진행자들의 내용없는 멘트와 불완전한 동시통역이 농담의 반을 망쳐버렸지만 말입니다.

가장 놀라운 깜짝 쇼는 우디 앨런의 등장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그가 그처럼 사랑하는 뉴욕시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요.

참, 도입부 클립에서 크리스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답니다. :-) (0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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