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지금까지 네 명(?)의 가족 구성원들이 끌어가던 영화에 두 명의 이방인들이 들어옵니다. 은주의 동생 선규와 아내 미희지요. 둘 다 오고 싶지 않은 티가 역력합니다. 하긴 누가 이런 초대를 반갑게 생각하겠어요?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연기 실력을 갈고 닦고 싶은 배우가 아닌 이상엔 말이에요.

듀나 이들이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제 추측이 여기서도 통하지 않겠어요? 단순히 후처의 동생이라면 무현이 이런 부탁을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파프리카 모짜르트의 음악을 틀고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은주의 모습은 정말 뻔뻔스러운 가식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고 염정아의 이런 가식 연기가 반복되는 동안 이 캐리커처는 점점 불쾌한 기괴함을 풍기기 시작합니다. 저 웃는 모습을 보세요. 무서워요.

듀나 한식을 내놓았던 전날과는 달리 오늘 저녁 메뉴는 완전히 서구식입니다. 닭요리에서부터 포도주에 이르기까지 모두요.

다시 김기영 영화들과 이 작품을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요. 김기영 영화에서 이런 종류의 서구 취향들은 미완성의 과도기적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야만적인 모방이었던 그런 취향들은 서구적 근대화의 과도기를 거치는 특정 시대에 대한 기술이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들의 저녁식사는 자기 나름대로 거의 완벽한 테이블 매너에 따라 진행됩니다. 더이상 모방의 흔적을 찾을 수 없죠. 아무리 요즘이라고 해도 보통 집에서는 이만큼 까다롭게 형식을 따지지는 않는데 말이에요. 이들의 저녁식사는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머리 속에서 재구성된 의식처럼 보입니다.

파프리카 은주는 지금 동생과 관련된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럴싸해보이던 회상은 비맞으면 옷벗는 미친 남자의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완전히 맛이 가버립니다.

문근영은 이 장면을 보고 웃는 관객들이 불만인 모양이군요. 근데 이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웃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기괴하고 비틀려있어도 희극적인 건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그 웃음은 그로테스크함에서 출발한 아주 전형적인 공포영화식 웃음입니다. 어색하고 기분나쁘고 뒷맛이 아주 안 좋아요.

이 장면은 [장화, 홍련]에 나오는 염정아의 첫 솔로입니다. 거의 한 배우를 위해 작정하고 삽입한 '명장면'이지요. 이 영화로 염정아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이 사람을 종종 '아시아 버전 글렌 클로스'라고 부르는데, 아마 이 장면도 그 평가에 한 몫 할 거예요. 극도의 과장과 신경질, 그로테스크한 희극과 차가운 응수의 갑작스러운 전환...

듀나 염정아의 프리마돈나 연기는 김갑수, 우기홍, 이승비, 이 세 배우들에 의해 보조됩니다. 특히 우기홍의 스토익하고 냉정한 대응과 이승비의 겁에 질린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은 근사합니다.

파프리카 딸의 농담을 듣고 있는 김갑수의 무표정함은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지 않나요?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무표정할 수는 없지요. 여기서 무현은 마치 훈련 끝에 동료의 농담에 무덤덤해진 코미디언 같단 말이에요.

"왜 기억 안나. 너 미쳤어?" 하하. 정말 무서운 장면이긴 하지만 안 웃을 수도 없군요. 한참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던 사람에게 이런 답변을 듣는다면 다들 황당해하겠지요.

듀나 잠시만요, 이승비의 발작 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이자벨 아자니 연기라고요.

파프리카 겁에 질린 은주가 뒤로 물러나고... 싱크대 밑에 있는 누군가가 미희를 보고 있습니다... 둘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은주가 비명을 질러대는군요.

듀나 그리고 수연이 깨어납니다... 수연의 유령이 깨어난 걸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타이밍은 조금 어긋납니다만.

이상심리를 묘사한 이전의 장면들과는 달리 이 장면은 노골적인 초자연현상에 기울어 있습니다. 수미가 연기하지 않는 제3자에 의해 경험된다는 것이 그 증거지요.

선규와 미희는 허겁지겁 그 재수없는 집에서 달아납니다. 미희는 남편에게 '싱크대 밑에 있는 어떤 여자 애'를 봤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레이어가 바뀝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DVD에서 레이어 전환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집에 있는 DVD 플레이어 하나는 문제가 있고, 다른 하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문제가 없는 플레이어고요.

파프리카 다시 영화는 망친 만찬 때문에 기분이 잔뜩 상해 있는 은주에게로 돌아오고 두번째로 무서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듀나 이 장면도 장르 관객들의 기대와 기존 관습을 영리하게 이용한 아주 효과적인 호러 장면입니다. 유령 이야기를 듣고 잔뜩 긴장해 있는 관객들 앞에서 보란 듯 싱크대 문을 끼익 열고...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보여준 뒤 싱크대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등 뒤에 있는 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 귀신을 보여주고 울음소리로 유도한 다음... 그 귀신을 다시 지운 뒤 갑자기 나타난 수연의 부러진 머리핀을 보여주고... 익! 싱크대 귀신이 손을 내미는군요. 곧이어 싱크대 귀신은 기가 막힌 텔레포트 능력을 이용해 겁에 질려 몸을 돌린 은주의 앞에 나타납니다.

공포의 정도는 깜장 귀신보다 떨어질지는 몰라도 이 장면의 효과는 더 오래갑니다. 전통적인 깜짝 쇼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으니까요. 더 통속적일 수는 있어도 이런 장면들의 무서움은 쉽게 사라지는 법이 아니거든요. 김지운 자신도 코멘터리 때마다 놀라더라고요.

지금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김지운이 얼마나 걱정했을지 이해가 됩니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이 장면들을 검토하는 동안 '첫번째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감을 완전히 잃었을테니까요. 감독도 '깜장 귀신' 장면이 그렇게 효과적일 거라고는 예측 못했을 거예요.

은주가 유령과 대면한 뒤의 이야기는 그 뒤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삭제 역시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내러티브의 구성에 한몫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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