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수미는 필사적으로 끈을 자를 가위와 칼을 찾습니다. 싱크대의 칼들이 달그락거리는 동안 물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두 진영의 무기들이 서로를 을러대기 시작한 것이죠.

파프리카 수미는 갑자기 은주 역할을 하며 약을 먹고, 부지깽이로 자루를 내려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물론 이건 영화적 통역을 거친 것입니다. 영화에서 1인칭 시점을 그대로 따른다면 아주 이상하겠지요. 하여간 여기서 비교적 흐릿했던 진상은 분명해집니다. 은주는 수미였던 것이지요.

듀나 약을 먹고 물을 마신 뒤 고개를 젖히는 저 행동은 연기일 것 같기는 한데... 배우 자신의 습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임수정은 차기작인 [...ing]에서도 저런 식으로 약을 삼키거든요. 이 영화에서 배운 걸 그 영화에서 쓰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파프리카 그래도 수미는 그 논리를 무시하고 자루를 찾아갑니다. 자루는 또 핏자국을 남기고 사라지고 없습니다. 자루를 찾던 수미는 수연의 옷장을 발견합니다. 옷장이 어떻게 여기에 내려왔는지는 묻지 마시길. 여기서부터는 비논리가 정상입니다.

옷장 안에는 자루가 들어 있습니다. 수미가 자루를 건드립니다. 자루는 꿈틀하며 움직이지요.

듀나 은주는 부엌에서 정체불명의 소리를 중얼거리며 피에 젖은 손을 닦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은주는 부정할 수 없는 레이디 맥베스입니다. "어떻게 저 작은 아이의 몸에서 피가 저렇게 많이 나온담?" (정말 이렇게 말한 건 아니에요.)

손을 닦은 은주는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자루를 막 열려는 수미에게 갑니다. 드디어 결투가 시작됩니다. 주전자가 날고 가위가 손등에 찍히고 온갖 자잘한 집안 물건들이 무기가 됩니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폭력적인 감정들이 말 그대로 폭발하는 부분으로 관객들에게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줍니다. 앓는 종기가 터지는 것과 같아요.

파프리카 싸움에서 진 수미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기절합니다.

다음 장면에선 은주가 기절한 수미를 질질 끌고 복도를 걷고 있지요. 이 장면이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상상해봐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현실 세계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희미하게나마 의식을 되찾은 수미의 눈에 현실 세계가 잠시 들어옵니다. 피도 사라지고 없고 앰비언스 조명이 만들어낸 그 불길한 색조도 없습니다.

은주는 눈을 가린 조각상을 끌고옵니다. 쓰러진 수미 위에서 은주는 긴 대사를 읊어요. "도대체,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전에 했던 말 기억나? 이런 날이 올 거라고 했던 말 기억나?" 여기까지는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해주는 중요한 힌트입니다. 다음부터 김지운이 이 영화의 제1주제로 삼은 대사가 나오기 시작하지요.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 다녀. 유령처럼."

수미는 "날 도와줘"라고 말하고 은주는 "그래... 내가 널 도와줄게. 우리 여기서 끝내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미에게 던지기 위해 조각상을 집어들지요. 여기서 수미는 지칠대로 지쳐 증오의 감정마저도 포기한 듯 합니다. 강한 인격인 은주는 수미를 대신해 최후의 선택을 하지요. 자살요. 자기를 죽이려는 은주를 바라보는 수미의 얼굴을 보세요.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평안해보이지 않나요? 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에 무현이 돌아오고 이 시도는 실패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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