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영화

2010.03.05 09:43

DJUNA 조회 수:2417

얼마 전에 극장 개봉된 [노마 진과 마릴린]은 좀 별난 영화입니다. 영화가 별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수입된 경로가 이상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이 영화는 이미 비디오로 출시되었습니다. 게다가 AFKN에서 죽도록 재방을 한 영화이기도 하죠. 개봉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이 영화의 재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동안 올라간 애슐리 저드의 인기 때문에 갑작수입을 했거나 창고에 썩어가고 있던 것을 다시 꺼낸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제작 과정입니다. 이 영화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용 영화죠. 이 영화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열받습니다. 감히 케이블 텔레비전용 영화를 극장용으로 고쳐서 수출해? 우리가 무슨 봉인 줄 아나?

그러나 이전에도 꽤 많은 케이블 텔레비전 용 영화들이 국내에 수입되었습니다. [노마 진과 마릴린]이 처음은 아니지요. 낙태 문제를 다룬 옴니버스 영화 [더 월],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블랙 코미디 [섹시 블루], 데니스 호퍼 주연의 [패리스 트라우트], 시간 여행을 다룬 서스펜스물 [래트로액티브]와 같은 영화들은 모두 미국에서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 케이블로만 방영되었던 작품 중 상당수는 외국에선 극장에서 개봉됩니다. [섹시 블루]처럼 케이블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서도 미국에서 잠시 극장 개봉된 작품들이 있고요. 우리만 '봉'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꼭 미국만의 일도 아니지요. 미국에서 극장 개봉되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던 많은 영국 영화들 역시 텔레비전 용이었거든요. [설득][콜드 콤포트 팜], [매혹의 4월]과 같은 영화들 말이에요. 지금은 고전이 된 많은 유럽 작품들 역시 텔레비전 용이었지요. [유보트], [파니와 알렉산더]와 같은 영화들을 보세요.

사실 점점 텔레비전 용 영화와 극장용 영화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제작 과정은 거의 같습니다. 다들 35밀리 필름으로 찍히고 요샌 텔레비전 영화의 감독이나 배우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죠. 그리고 사실 [노마 진과 마릴린]을 극장에서 보는 관객들은 미국 시청자보다 더 제대로 영화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케이블 오리지널이라는 영화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영화의 팬앤스캔버전이거든요. :-) 원래 그런 비율을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그건 다른 극장용 영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극장용 영화들은 비디오로 출시되거나 텔레비전으로 방영될 때를 대비해서 어느 정도 팬앤스캔 상태를 고려하거든요. 게다가 그런 영화들 중 상당수는 정말로 케이블 텔레비전을 고려해서 만든 작품들이 아닙니다. [패리스 트라우트]만 해도 원래는 극장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케이블로 방영한 것이니까요.

앞으로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몇 년 안에 텔레비전의 화면 비율은 극장용과 같아질 것이니 화면 비율의 문제도 해결되겠지요. 디지털 작업이 보편화되면 지금까지 텔레비전 연속극과 영화를 갈라놓았던 화면의 차이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배우들은 점점 텔레비전 출연을 자신의 몸값을 깎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고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이어지면 훨씬 더 많은 영화들이 극장 밖에서 기회를 찾을 것입니다. 앞으로 영상매체를 어디를 통해 볼 수 있느냐로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질일 것이란 말이죠. 멋진 신세계겠지요? 앞으로는 아날로그 기술이 그어놓은 지리적 경계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나라의 시네마테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어지겠지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텔레비전 용 영화와 극장용 영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근거는 구분자의 스노비즘이었습니다. 질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중요한 것은 '어디 출신이냐'였습니다. 그건 일종의 지역 차별이었지요. 그 차별을 시작한 맨 처음 사람에게는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건 그냥 의미없는 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유명한 평론가는 '텔레비전 연출가는 절대로 위대한 영화 감독이 될 수 없다!'라고 매정하게 외치기도 했죠. 스티븐 스필버그나 시드니 루멧 같은 텔레비전 출신의 거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뒤에 서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그건 영화가 영화라는 신종 장르라는 이유만으로 몇십년 동안이나 지독한 차별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유였을 겁니다. 영화가 어느 정도 자라자 또 신종 장르였던 텔레비전 물들을 구박한 것이죠. :-) 며느리가 시어머니 미운 짓을 그대로 닮은 꼴이라 할까요?

그렇다고 텔레비전이 영화의 영역을 넓혀주는 도구에 불과할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닐 겁니다. 텔레비전에는 텔레비전 고유의 영역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극영화라는 것도 텔레비전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죠. 얼마 전에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비행한계선]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겁니다. 그 작품은 녹화 방송이 불가능했던 50년대 텔레비전이 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흑백 생방송이었던 거죠. 배우들은 수백만의 시청자들이 그들을 구경하는 바로 그 순간 직접 연기를 해야했습니다. 그런 생방송은 생방송 특유의 서스펜스와 현실성으로, 녹화되어 편집된 일반 극영화와는 다른 어떤 강렬함을 줄 수 있습니다. 영화와 텔레비전의 경계가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텔레비전은 이런 자기 정체성을 찾는 실험을 계속하지 않을까요? 아마 그러는 동안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것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것도 신종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구박받겠지만요. (0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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