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 잡담

2010.03.05 09:45

DJUNA 조회 수:1813

1. 목소리

요새 미국 영화의 예고편들은 모두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들의 목소리로 도배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그들은 목소리가 너무 닮아서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예요. 아님 정말 한 사람인 걸까? 모르겠군요.

이런 목소리를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소리가 굵으면 일단 안정감이 생기고, 안정감이 있으면 상품에 대한 믿음도 증가하지요.

그러나 너무 같은 소리만 듣고 있으려니 지겹지 않으세요? 톰 크루즈가 인기가 좋다고 해서 크루즈만 주연 배우로 쓰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잖아요.

가끔 살짝 나레이션의 목소리를 바꾸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도 있습니다. [식스티 세컨즈] 예고편에서는 살짝 놀려대는 여자 목소리를 삽입했는데, 그게 상당히 기억에 남았어요. [워크 온 더 문] 예고편에서는 출연 배우 안나 파퀸의 목소리를 사용했는데, 그 결과 굵은 목소리 아저씨보다 훨씬 친밀감이 높아졌죠.

개인적으로 여자 목소리의 비중이 좀 높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엔 굵은 목소리 아저씨가 어울리지 않는 영화들도 많으니까요.

2. 스트립티즈

예고편은 스트립티즈와 같습니다. 알맹이는 감추면서 맛만 살짝 살짝 보여주며 관객들을 감질나게 만들어야 하죠.

말로는 쉽죠. 하지만 정작 실제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잘 만든 예고편으로 유명한 [식스 센스]도 그런 면에서 크게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보여요"는 분명히 강렬한 흡인력이 있는 대사였지만 정작 영화의 핵심이기도 했으니, 예고편을 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쇼크를 잃고 영화를 본 셈이었죠. 히치콕 역시 교묘한 스트립티즈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그는 [사이코] 예고편에서 샤워실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멋진 티저였지만 정작 영화가 추구한 반전과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았죠.

그렇다고 '최상의 효과'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어떻게든 영화를 팔아야 할테니까요. 수퍼 스타가 나오지도 않고 베스트셀러가 원작도 아닌 영화라면, 내용을 보여줄 수밖에요.

그 결과 종종 예고편이 영화의 전부를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블레어 위치]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예고편으로 써먹고 있었지요. [스타 워즈 에피소드 1]의 예고편들이 본편의 알맹이를 다 꺼내먹었다는 사실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요새 그런 식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예고편은 [왓 라이즈 비니스]입니다. 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반전이고 뭐고 다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 영화 보기 전에는 안 볼 예정입니다. 앰버 발레타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싶기는 하지만요.

3. 국내 예고편

요새 한국 영화 예고편들의 질이 갑자기 좋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적어도 웬만한 유럽 예고편들보다는 훨씬 나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배우들이 말만 하지 않는다면 (슬프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제대로 대사 처리를 할 줄 아는 영화 배우들이 극히 드무니까요) 정말 어떤 작품들은 할리우드 예고편들보다 나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영화판 사람들이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결과겠지요. 케이블 방송의 도입 이후 갑작스럽게 성장한 뮤직 비디오 산업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겠고요.

문제는 이 이미지를 다루는 재주의 발전이 영화를 만드는 재주로 이어지느냐인데... 아직까지는 아닌 듯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상업적 장르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의 질을 상승시키는 데는 큰 역할을 못한 듯 해요. 아마 이번 여름에 튀어 나온 청춘 호러 영화들이 그 증거가 될 겁니다. 그 중 몇 편은 꽤 모양이 살거든요. 문제는 모양만 산다는 것이지만.

이미지 다루는 법이 뮤직 비디오한테서 수입해 온 것이라면, 제대로 된 연기와 그럴싸한 캐릭터와 스토리는 어디에서 수입해야 하는 것일까요? (0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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