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특수효과

2010.03.05 09:54

DJUNA 조회 수:3521

전 LP 애호가가 아닙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별 대안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LP를 챙겨야했지만 CD 시대인 지금까지 거기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요.

한마디로 제 취향을 따르기엔 너무 번거롭습니다. 돌아가는 시간은 너무 짧고 달라붙는 먼지들은 끔찍하며, 바늘 역시 신경 써서 갈아주어야 하지요. 심지어 회전 속도 조절하는 것 같은 간단한 작업도 장난이 아닙니다.

하지만 CD를 선택하면 이 모든 고생은 사라집니다. 그냥 플레이어에 넣고 작동시키기만 하면 되니까요. LP 애호가들의 아날로그 예찬과 같은 건 저랑 인연 없습니다. 전 CD의 디지털 음향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최근들어 제가 아날로그 예찬자가 되어 '그 좋았던 옛날'에 대한 감상적인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으니, 제 주변사람들이 다들 뭔가 잘못되었다고 웅성거린 건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아날로그를 다루는 고생이 남의 것이라면 전 상관 없습니다. 먼지 제거해주고 바늘 갈아주는 고생을 딴 사람한테 떠넘기고 듣는다면 LP 감상도 괜찮지요.

갑자기 저를 감상적으로 만든 것은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된 옛 할리우드 영화들이었습니다. 특히 구식 광학 특수 효과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의 영화들 말입니다. [바론의 대모험][돌아온 오즈]... 물론 [이티]나 복원되기 이전의 [스타 워즈] 시리즈도 있습니다.

왜 이런 영화들에 대해 감상적이 되는 걸까요? 그건 이런 영화의 특수 효과들이 요새는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영화의 구식 특수 효과에는 요새 특수 효과의 화려함과 속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식 광학 효과들이 주는 푸근한 아름다움에는 디지털 특수 효과가 가지지 못한 어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블레이드 런너]의 푸근한 색조와 [로스트 인 스페이스]의 금속성 번들거림을 비교해 보세요.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겁니다.

게다가 구식 효과의 기술적 제한은 영화를 더욱 창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새 디지털 특수 효과들의 제작 과정은 별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컴퓨터로 오브젝트를 만들어 심어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까다롭고 잔손가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해결 방식을 끌어내는 방법이 너무 쉬워서 영화가 종종 안이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압력이 있었던 그 옛날에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훨씬 창의적이 되었습니다. 전 마리오 바바가 바바라 스틸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기 위해 동원했던 조명 트릭, 헤어조크가 카메라 각도만으로 만들어낸 흡혈귀의 텅빈 그림자와 같은 것들에 대해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더 재미있죠.

물론 컴퓨터 그래픽이 주도하는 영화특수효과가 다시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컴퓨터는 버리기엔 너무나도 유용한 기계니까요.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사실 컴퓨터 이전의 특수 효과는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데이빗 린치의 [듄]을 보세요. 모래충들이 어쩌면 그렇게 가짜 같은지. 게다가 가장자리 경계선은 왜 그렇게 뚜렷한 것일까요.

그러나 아날로그 특수 효과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유용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심나신다면 코폴라가 감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같은 영화를 보세요. 그 영화의 화려한 비주얼은 대부분 아날로그 특수 효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영화에는 그런 유산이 없습니다. 우리 영화의 특수 효과도 점점 발전하고 있지만 발전한 부분은 대부분 디지털 특수 효과 부분이죠. 영화라는 장르가 시작할 때부터 이어졌던 멜리에스의 마술적 전통이 우리에게는 거의 닿지 않았던 겁니다. 슬픈 일이에요. (0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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