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1998)

2010.02.13 18:29

DJUNA 조회 수:12462


1.

성공적인 상업 예술가들은 늘 그들의 명성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죠. 그들 중 일부, 그러니까 자크 오펜바흐, 조지 거시윈, 안톤 체호프와 같은 사람들은 훌륭하게 성공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다는 자신의 속물적인 갈망을 무시했다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잃었겠지요.


스필버그 역시 그런 부류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죠스]나 [이티] 같은 영화들은 그에게 엄청난 명성과 돈을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스필버그 영화'라는 감옥을 만들어 그를 감금해왔으니까요. 그는 필사적으로 그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반복은 예술가로 인정받으려는 스필버그의 스노비즘과 '스필버그 영화' 밖의 스필버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평계와 대중의 스노비즘 사이의 긴 결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필버그가 "더이상 구로자와 아끼라나 마틴 스콜세지가 되려고 하지 않겠다"며 [후크]를 찍을 때만해도 후자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엄청난 성공 이후 사태는 바뀌었습니다. 적어도 이제 그의 '예술적 영화'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으니까요.


2.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윌리 길리스죠. 노먼 로크웰이 전쟁기간 동안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커버에 그려댄 이 가공의 젊은이는 아직도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전쟁의 카오스로 말려든 평범한 젊은이였고 전쟁의 와중에도 로크웰 특유의 낙천주의를 잃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험은 유명한 [귀향([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 홀리 헌터의 캐릭터가 죽자고 뉴스 클립에 끼워넣으려고 했던 바로 그 그림입니다)]에서 마무리되었고 그는 다시 평범한 로크웰 식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로크웰은 전쟁 장면을 그린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길리스가 군복을 입고 교회에 가는 것을 보았고 철모를 쓴 그의 사진이 길리스 가문의 벽을 장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볼 만도 합니다. 길리스는 전쟁 동안 무엇을 보았을까요?


3.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길리스가 아마도 보았을지도 모르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웬만한 스플래터 영화 뺨치는 고어로 가득 찬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끔찍한 묘사(이런 장면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장난같은 장면들은 왜 다 잘라냈는지 모르겠습니다)는 한마디로 관객들의 얼을 빼놓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초반 20분이 '걸작'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물론 이것이 전쟁입니다. 진짜 전쟁은 프라모델 조립광의 백일몽이나 액션 영화에 나오는 마초 판타지와는 다릅니다. 스필버그는 '그대로 보여준다'라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며 전쟁에 대한 모든 로맨틱한 환상들을 깨부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나름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4.

어마어마한 프롤로그로 관객들의 얼을 빼놓은 다음,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라이언 집안의 네 형제 중 세 명이 전쟁터에서 죽었는데 남은 한 명이 독일 점령지 어딘가에 떨어져 실종되었다는 겁니다. 마샬 장군은 링컨 대통령의 편지를 거창하게 인용하며 그를 엄마 품에 돌려 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부터 밀러 대위 일행의 [암흑의 핵심]식 오디세이가 시작되지요.


생명이 개입되어 있을 때 초보적인 산수는 묘하게 비틀린 답을 내놓습니다. 과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요?


대충 생각해보면 말도 안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새파랗게 젊은 친구들이 팔순의 노인네를 구하려고 불 속에 들어갔다가 노친네만 구하고 자기들은 질식해 죽어버린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이게 무슨 시간과 생명의 낭비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짓을 합니다. 그게 인간처럼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미덕입니다. 소방수들보고 불 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런 산수를 해보라고 해보세요. 정신 사나워서 일을 못할 겁니다. 그들은 그냥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타정신이 손에 손을 거쳐 서류화 되어 명령계통을 따라 전달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마샬 장군이야 손해보는 일은 없죠. 폼잡고 연설한 뒤 명령만 내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한 생명을 구한다는 뿌듯한 마음에다 선전효과까지 곁들여지니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명령 때문에 점령지로 뛰어든 여덟 명한테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런 이타주의가 일단 마음에 와닿지가 않는 데다가 자기네들의 목숨까지 왔다갔다 하는 일이니까요. 물론 그들은 지금까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새로 떠맡은 임무가 워낙 다르다 보니,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치러왔던, 그리고 앞으로 치를 전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보여지게 되지요. 마치 '사과'라는 단어를 생각없이 쓰다가 갑자기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로다트와 스필버그는 업햄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킵니다. 전투경험이 전무한 업햄을 따라가며, 우리는 조금씩 전쟁에 대한 상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가벼운 흥분에서 시작해서 이상주의와 현실의 충돌, 무조건적인 공포,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되는 장면까지, 업햄은 전쟁이 보통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옆좌석에 앉아 있던 아무개 씨는 후반부의 전투신이 진행되는 동안 "바보야, 올라가! 올라가!"따위의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더군요. 그가, 그리고 다른 관객들이 업햄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 이유는 업햄이 바로 관객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언가 그럴싸한 일을 해서 자신의 비겁함을 커버한다면 우리는 폭로될 위기에서 벗어나 안심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업햄의 비겁함은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실전경험없는 행정병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다른 병사들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과 비교해서 다른 병사들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5.

영화의 세번째 도막은 밀러 일행이 라이언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라이언은 귀환을 거절하고 동료들과 남겠다고 말합니다. 용감한 결심이지만 리얼리티를 떨어뜨릴만큼 작위적이지는 않죠. 밀러 일행은 돌아가는 대신 라이언과 함께 남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후반부를 장식하는 전투를 준비합니다.


후반부의 전투신은 비교적 관습적입니다. 소수 정예가 다수의 적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죠. 초반 우세에서 열세로, 그리고 거의 패배처럼 보이는 순간에 연합군 공습이 개입되는 순서도 헐리웃 영화가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쌓아올린 공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구조상, 초반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부분과 내용면에서는 대비되지만 비슷한 강도의 전투신으로 클라이맥스를 끌어내야 했을테니 이런 내용의 선택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프롤로그가 거의 자연재해와 같은 거대한 참사를 다루고 있다면 마지막 전투는 보다 개인적입니다. 규모가 작고 그 동안 관객들이 등장인물들과 친근감을 쌓아 왔으니까요. 초반부와 같은 고어나 카오스는 없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개별죽음들의 의미는 훨씬 큽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개별 캐릭터들의 가치가 강조되기도 하죠.


6.

앞에서 우리는 윌리 길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먼 로크웰을 이렇게 끊임없이 언급하는 이유는, 스필버그의 이 영화가 지극히 미국적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중심적이라거나 미국 우월주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지극히 노먼 로크웰 적이란 말입니다. 이 영화는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 나갔던 수많은 윌리 길리스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로크웰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쟁을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로크웰식의 푸근한 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한 점에서 수렴됩니다. 스필버그는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오히려 로크웰의 세계를 업데이트시키고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끔찍한 묘사와 끊임없이 마초 판타지에서 우리를 몰아내는 업햄의 존재는, 전쟁이 결코 액션 영화같지 않았음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길리스들의 가치와 희생의 의미를 강화시키니까요. 밀러 대위의 직업과 고향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더 분명해집니다. 밀러는 필사적으로 길리스인 자신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길리스였으니까요. 물론 이 모든 길리스들의 이야기는 진짜 길리스인 라이언에 의해 완벽하게 마무리지어집니다. 외국인 관객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앞뒤의 성조기 장면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영화를 만들다보면 당연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7.

한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매우 자기기만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반전 영화는 아닙니다. 적어도 반전 메시지가 전부는 아니죠. 생각해보면 그냥 반전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간단하고 공허해지기 쉬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끔찍하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 요새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용감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무언가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려는 말은 플롯만큼이나 보편적이지요. 이 작품은 희생의 가치, 존엄성, 평범한 사람들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고결한 행동에 대한 영화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가장 큰 장점은 수다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수다가 [플래툰]이나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의 약점이었지요. 스필버그는 전쟁을 그냥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 감정과 정서를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모양입니다. 관객들이 로크웰식의 소박한 이상주의 따위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덩어리들은 그냥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게 진짜 덩어리이기도 하고요.


8.

스필버그와 같은 '스타' 감독의 유리한 점 중 하나는 대규모의 상업 영화를 만들면서도 스타 배우들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늘 다양한 배우들을 효율적으로 자기 영화에 끌어들여왔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필버그 자신은 이 영화를 '아주 비싼 인디 영화'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곤 했는데, 톰 사이즈모어, 에드워드 번즈, 제레미 데이비스, 애덤 골드버그와 같은 인디 배우들이 부글거리는 캐스팅을 보면 그 말이 아주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두 명의 '스타'가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매우 제임스 스튜어트 풍인 톰 행크스와 영화가 끝난 무렵 갑자기 스타가 되어버린 맷 데이먼이지요. 그러나 이들이 이 영화에서 했던 가장 훌륭한 일은 스타라고 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스타 배우들의 '명연'이 아니라 앙상블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모두 잘 했습니다.


단지 영화외적으로 조금 황당하게 느껴지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테드 댄슨의 카메오 출연은 그가 아무리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어도 조금 희극적으로 느껴집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프렌즈]의 가장 황당한 게스트 배우가 두 명이나 나옵니다! 피비의 이복 동생 프랭크 역을 하는 지오바니 리비시와 챈들러의 사이코 룸메이트 에디 역을 했던 애덤 골드버그 말이지요.


9.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게릴라 전법으로 만든 스필버그의 두번째 영화입니다. 스토리보드없이 핸드 헬드를 잔뜩 써서 꽉 짜여진 스케줄에 맞추어 허겁지겁 찍어대고 게다가 먼저 만든 영화의 후반작업까지 병행하면서 자기 진을 쥐어짜는 일 말이지요.

결과는 성공적입니다. 언제까지 이 방식이 먹힐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수법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뭔가 이루려면 부지런해야 하나봐요. 아무리 입지가 단단한 스필버그 같은 사람이라도 말이에요.


10.

월요일에 시네 코아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사운드는 좋았지만 금관 악기들의 소리가 조금만 올라가도 갈라지더군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98/09/17)


★★★☆


기타등등

당시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지상 최대의 작전]을 보세요. 


감독: Steven Spielberg  출연: Tom Hanks, Tom Sizemore, Edward Burns, Barry Pepper, Adam Goldberg, Vin Diesel, Giovanni Ribisi, Jeremy Davies, Matt Da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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