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턴 부인 That Hamilton Woman (1941)

2010.02.08 09:55

DJUNA 조회 수:5229

감독: Alexander Korda 출연: Vivien Leigh, Laurence Olivier, Alan Mowbray, Sara Allgood, Gladys Cooper, Henry Wilcoxon

1.

전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읽으라고 내밀어 주는 '위인전기'들이 참 싫었습니다. 특히 국내편은요. 그 책들의 주인공들은 우국충정으로 불타는 몸과 마음을 나라에 던지는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는 중년 남자들로, 도대체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같지도 않고 공감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고 무얼 배우란 말인지? 이런 걸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은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전 아직도 그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내밀고 독후감을 쓰라고 하면 못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나이가 들어, 읽고 있는 책들에 슬슬 다른 정보들이 들어가면 전기나 역사책들도 재미있어집니다. 그 뻣뻣한 괴물들도 사실은 흠집투성이에 다양한 남녀상열지사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어렸을 때 그것은 굉장히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레이디 해밀턴의 러브 스토리도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용은 타블로이드 신문용 섹스 스캔들에 불과하지만, 넬슨 제독이라는 인물을 위대한 석고상에서 결점투성이의 피와 살이 끓는 살아있는 남자로 만들기엔 충분했습니다. 전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수상쩍어보이는 성웅 이순신의 전기보다 이 외팔이 남자의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가 더 좋습니다.

2.

알렉산더 코르다의 [해밀턴 부인]은 상당히 음흉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겉으론 넬슨 제독과 사랑에 빠졌던 엠마 해밀턴이라는 여자의 비극적인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천한 출신이었지만 나폴리 대사의 아내가 되고 나중에 역시 유부남이었던 넬슨 제독과 화끈하고 요란한 스캔들을 뿌렸던 그 유명한 여자 말이에요.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스토리 밑에는 예술적으로는 얄팍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절실한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해밀턴 부인]은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 사람들에게 친영국적인 감정을 호소하기 위한 프로파겐다 영화였습니다. 덕택에 코르다는 미하원에서 이 영화를 만든 목적에 대해 증언해야 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때맞추어 일어난 진주만 공습 때문에 무산되었지만요.

그 때문인지, 영화는 불륜을 다룬 러브스토리치고는 무척 애국적입니다. 해밀턴 대사나 넬슨 제독 모두 영국 예찬과 애국심 호소를 입에 달고 다니고요. 그 중 몇몇은 보는 사람이 닭살돋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하긴 애국자라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런 요소들이 조금씩 있기는 합니다만.) 현대 관객의 눈에는 18세기를 살았던 영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던 제국주의적 시각이 거슬리기도 하지요.

몇몇은 지독한 내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지구본을 보면서 '아, 이 작은 영국!'이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세요. 18세기 말의 영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내숭은 한참 독일군의 공습을 받고 있던 당시의 외롭고 작은 나라 영국에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이 영화를 보았던 많은 사람들은 '아, 이 작은 나라!'라는 대사에 눈시울을 적셨겠지요.

3.

이런 애국적 요소는 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긍정적인 영향도 끼쳤고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습니다. 애국심 역시 충분히 격렬하고 진실되다면 훌륭한 예술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 담겨져 있는 애국심은 나름대로 진실된 것이라 그 노골적인 선전성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강한 느낌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가 러브 스토리와 결합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애국심은 이 영화의 실제 줄거리와 그렇게 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화의 정치적 선전은 종종 러브 스토리의 맥을 끊어놓습니다.

애국심은 넬슨 제독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도 방해가 됩니다. 이 영화의 넬슨은 불륜의 주인공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적 선전용 '위인'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 속의 넬슨에서 이런 불륜 스토리를 생기있게 만드는 열정을 찾아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연애 이야기에서 열정이 빠지면 그건 큰 문제지요.

4.

[해밀턴 부인]은 위에 언급한 다양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롭고 엠마 해밀턴이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우며, 언제나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노골적인 멜로드라마의 속성을 담뿍 안고 있는 작품이니까요. 스토리는 빠르고 액션도 화끈해서 12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영화의 일등공신은 비비안 리입니다. 하긴 영화 전체가 비비안 리를 위한 작품이지요. 이 영화에서 리는 이 배우가 이전에도 여러번 했었던, 약간 천박하지만 솔직하고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 역을 아주 근사하게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답지요. 비비안 리의 팬들은 리의 정신없이 아름다운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을 겁니다.

그에 비해 로렌스 올리비에는 다소 기가 죽은 듯 합니다. 비중이 작고 영웅적인 뻣뻣한 캐릭터가 그의 열정을 가로막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그는 넬슨을 연기하기엔 너무 젊고 잘생겼어요. 넬슨의 불구는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 더 심했고 그 모습도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러브 스토리니 이해해야 한다고 등뒤에서 누군가가 말하지만, 전 넬슨의 원래 모습을 배우에게 부여했다면 더 영화가 흥미로워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99/12/19)

★★★

기타등등

1. 영화는 엠마의 비극적인 말로가 마치 넬슨 제독의 죽음 때문인 것처럼 끌고갑니다만, 솔직히 이런 관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엠마는 넬슨과 남편 모두한테서 상당한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그녀가 알거지로 죽은 건 순전히 재산 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죠.

2. 수잔 손탁이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The Volcano Lover : A Romance]라는 소설을 쓴 적 있습니다. 아마 번역되어 있을텐데, 번역제목이 무엇인지는 잘 기억 안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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