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2001)

2010.01.30 22:18

DJUNA 조회 수:13281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ABC 텔레비전 시리즈의 파일럿으로 계획된 작품입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트윈 픽스]처럼 길게 끄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되어 컬트 팬들을 모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ABC 사람들은 파일럿을 싫어했고 (너무 괴상하다고 생각했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 린치한테서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시리즈는 시작하기도 전에 공중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린치는 공중 분해된 다른 파일럿들을 만든 감독들보다는 운이 좋았습니다. 파일럿이 방영될 가능성이 없어지자 프랑스의 카날+에서 그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이미 찍은 파일럿을 극장용 장편으로 고치는 게 어떠냐고요. 제안을 받아들인 린치는 배우들을 다시 불러 모아 결말 부분을 찍고 재편집해서 2시간 반짜리 영화를 내놓았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정체불명의 여인 리타와 캐나다에서 할리우드로 날아온 배우 지망생인 베티입니다. 리타는 베티의 고모네 집에 숨어있다가 베티에게 발견되고 둘은 리타의 과거를 캐내기 위해 풋내기 탐정 콤비처럼 로스앤젤레스 시내를 누빕니다.


여기엔 다른 이야기도 섞여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야기는 주연 배우 기용에 참견하는 정체불명의 거물들 때문에 고생하는 젊은 감독 애덤 캐셔의 이야기입니다. 그 외에도 전날에 꾸었던 악몽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 남자 이야기, 예상 못한 상황 때문에 난처해하는 살인청부업자 이야기 같은 것들이 사이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시리즈의 잔재라고 할 수 있죠. 아마 이 작품이 계획대로 시리즈화 되었다면 이 사람들도 자기들만의 스토리 라인을 가졌을 겁니다.


시리즈의 흔적은 크레딧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앞 장면에 형사로 몇 초 나오고 마는 로버트 포스터도 엄연히 오프닝 크레딧에 이름을 걸고 있으니까요. 비교적 조연에 불과한 저스틴 테로가 주연인 나오미 와츠나 로라 엘레나 헤링보다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내용도 그 때문일까요? 어느 정도는요. 시리즈가 실현되었다면 리타의 비밀이 다 밝혀지지는 않아도 그 비밀을 맥거핀 삼아 미스터리는 계속 흘러갔겠지요.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하고 주연을 여자들로 바꾼 [트윈 픽스]와 비슷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위에서 상상한 시리즈 [멀홀랜드 드라이브]와는 달리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도대체 내용 파악이 안되는 작품입니다. 앞의 3분의 2는 그래도 리타의 과거를 찾아나서는 추리물 같습니다. 그러나 일단 전환점을 넘어서면 이야기는 막 나가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워들은 정보와 캐릭터, 이야기들이 전혀 다른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 이성적으로는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는 악몽의 미로 속으로 관객들을 집어던지는 것이죠.


도대체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수많은 가설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전반부가 꿈이고 후반부가 현실이거나 전반부가 현실이고 후반부가 꿈일 수도 있지요. 꿈꾸는 사람은 리타나 베티일 수도 있고 다이앤이나 카밀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모든 게 로스앤젤레스로 이사온 [트윈 픽스] 망령들의 장난일 수도 있지요. 어느 게 진상일까요? 린치도 모를 겁니다. Salon.com의 평론가가 아무리 공들여 다이앤 꿈 가설을 완성시켰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 생각이죠.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이치에 닿는 말이라고 늘 진실은 아닙니다.


많은 린치의 영화들이 그렇지만,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구체적이고 일관성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품으로 보면 영화의 재미를 대부분 놓치고 맙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서너 개의 다른 상자에서 가져 온 지그소 퍼즐 조각들을 뒤섞은 듯한 작품으로, 그런 설명되지 않는 신비함과 비논리성이 매력인 작품이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와 꿈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아무 주제도 없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인용하기 좋은 구체적인 문장을 쓰지는 않지만 분명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에 대해 뭔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흠... 바로 위에 써먹은 '꿈의 논리'라는 말과 '꿈의 공장'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겹치는군요. 아마 린치의 의도도 그것일 겁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꿈처럼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할리우드식으로 도식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심야시간대에 방영하는 싸구려 영화들을 멋대로 잘라붙여 조립한 것처럼요. 일부는 할리우드 비하인드 스토리, 일부는 수사물, 일부는 레즈비언 에로티카, 일부는 쿠엔틴 타란티노 풍의 블랙 코미디... 순진한 금발 머리 배우 지망생인 베티와 신비스러운 검은 머리 팜므 파탈인 리타(심지어 그 이름도 [길다]의 리타 헤이워드에서 따온 것입니다!)의 노골적인 대조나 40년대 댄스 스타였던 앤 밀러의 존재가 부여하는 클래식 할리우드의 음침한 잔재 역시 할리우드 영화의 그림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영화의 시대 배경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간다는 분위기도 풍기고요. 특히 50년대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합니다. 결국 이 모든 건 '할리우드 드림'인 것이죠.


그러나 꿈은 허공에서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할리우드 영화의 조각들을 끌고 들어와 꿈을 꾼다고 해도 현실의 재료가 필요해요. 여러분이 제가 위에서 예로 든 가설들 중 어느 쪽을 택해도 그 해석은 꿈꾸는 자와 꿈의 관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꿈의 이야기를 다시 '꿈의 공장'이라는 진부한 표현과 연결짓는다면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할리우드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작자와 할리우드 시스템의 관계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배우와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창작자와 창작품의 관계일 수도 있고, 스타와 관객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해석이야 어쨌건,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인상적인 꿈입니다. 새롭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우린 이미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조각들을 그의 이전 영화들에서도 보았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인격 교체, 신비스러운 남자의 이상한 협박, 붉은 커튼, 마이클 J. 앤더슨, 로이 오비슨... 그러나 전체적으로 짜맞추어진 결과는 비슷한 악몽이었던 [로스트 하이웨이]보다 훨씬 맛깔스럽군요.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베티와 리타의 묘사에는 그의 이전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보입니다. 상당히 공감가는 인물들이기도 하고요. 나오미 와츠와 로라 엘레나 헤링과 같은 배우들이 린치 영화답지 않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요. 특히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캐릭터들을 흠 하나 없이 늘씬하게 연기해낸 와츠는 린치의 꼭두각시 위치에서 거의 빠져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애당초부터 완벽함을 의도하지도 않은 작품한테서 그런 걸 기대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린 그저 의자에 몸을 푹 묻고 린치가 뒤섞어 내는 꿈과 감정의 흐름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걸 즐기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습니다. 린치가 언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었던가요? (01/11/07)


★★★☆


기타등등

1. 40년대 MGM 뮤지컬에 나오는 앤 밀러의 발랄한 이미지만 기억하는 분들에겐 이 영화에 나오는 밀러의 모습이 꽤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긴 저 역시 이 사람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2. 많은 배우들이 시리즈의 좌초를 아쉬워 하겠더군요. 시리즈가 실현되었다면 카밀라 역의 멜리사 조지 같은 배우들은 상당히 비중이 커졌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3. 모델 미셸 힉스가 안경을 쓰고 신시아란 영화사 직원으로 나온답니다.


4. 다이앤이라는 이름이 처음 발음되었을 때 [트윈 픽스]를 떠올린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5. 저녁에 단 한 번 발랐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당하고 잔디밭에서 기절했다 깨어나서 남의 집에 숨어들어가 샤워를 하고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입술에 그대로 남아있는 리타의 수퍼 립스틱은 도대체 어디서 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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