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애 (2000)

2010.02.07 23:26

DJUNA 조회 수:5821

감독: 이현승 출연: 이정재, 전지현, 김무생, 조승연, 민윤재, 김지무, 최윤영 다른 제목: Il Mare

우연인지, 음모인지는 몰라도, 2000년엔 시간 여행을 다룬 로맨스 판타지가 두 편 나왔었죠. 하나는 김정권의 [동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늘 다룰 이현승의 [시월애]였습니다.

둘 다 그렇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만한 영화들은 아니었지만 첫 승부는 [동감]의 승리였습니다. 비평면에서도 그랬고, 흥행면에서도 그랬고요. 아마 [시월애]는 [동감]보다 몇 개월 뒤에 개봉되어 손해를 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 평가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바깥 동네에서는 [Il Mare]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해외 한국영화 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늘어난 할리우드 리메이크 예정작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왜냐고요? [엽기적인 그녀] 이후 로켓처럼 솟아오른 전지현의 인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때깔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디어와 스토리 설정면에서 [동감]이 [시월애]보다 조금 나았다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시월애]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거죠. 어차피 둘 다 그렇게 독창적인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언어와 문화 장벽을 일단 한 번 넘어선 뒤엔 [시월애]가 유리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어요.

[시월애]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시간여행 이야기입니다. [동감]에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두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이 아마추어 무선통신이라면 [시월애]에서는 우편함이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갯벌 위에 세워진 일 마레라는 집에 이사온 남자 주인공 성현은 그 집에 살았다는 은주라는 여자한테서 우편물들을 대신 받아달라는 편지를 받는데, 사실 은주는 성현이 집을 떠난 뒤에 이사온 사람이었지요. 2년을 넘는 시간을 뚫고 펜팔을 주고받는 동안 성현은 서서히 은주를 사랑하게 되지만 은주는 아직 옛 사랑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지요.

[시월애]의 각본은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편이 아닙니다. 믿음직한 감정이 터져나오기엔 모든 게 너무나 공식적이고 인위적이지요. 캐릭터들은 도식적이고 두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고민도 자연스러운 흐름보다 의무감과 공식을 따르고 있지요.

시간여행이라는 주제도 그렇게까지 잘 살려진 편은 아닙니다. 하긴 이건 장르 독자의 불평인지도 모르겠어요. 설명이 부족하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지는 결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왜 미래로 뚫려있는 우편함을 발견하고도 주식투자로 떼돈을 벌어 2년 뒤에 둘로 나눌 생각을 안 한단 말입니까? 그게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면 전쟁을 막거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잖아요.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열려있는데도 이들은 우편함이 신기하다고 잠시 생각한 뒤 펜팔 도구로만 쓸 뿐입니다. 로맨스 판타지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주인공들에겐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인물의 생기가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물론 [시월애]를 스토리만으로 평가하는 건 핀트가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영화는 팔할이 비주얼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공간은 연애하고 편지 쓰는 주인공들과는 별도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엇갈리는 시간 속에서 흐르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진짜로 살리는 건 은주와 성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수가 바뀌는 갯벌 위에 세워진 일 마레라는 공간입니다. [시월애]라는 영화를 진짜로 즐기는 방법은 맥없이 표면 위로 흐르는 줄거리는 대충 넘기면서 영화의 비주얼이 담고 있는 숨은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걸 고려한다고 해도 [시월애]는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닿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인공적이고 깨끗해요. 인공적이라는 이유만 가지고 무조건 영화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이 경우는 작품의 힘을 빼버릴 정도입니다. 이 영화는 1시간 반짜리 커피 광고처럼 보입니다. 은주와 성현 역시 살아숨쉬는 인물들보다는 거액 개런티를 받고 포즈를 취하는 CF 모델들처럼 보이고요. 모든 게 너무 예쁘게 짜여져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스타일이 영화를 구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영화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월애]는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흔들리는 영화입니다. 인공적인 스타일 때문에 드라마의 생기를 놓쳤지만 그 고도로 계산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인기있는 작품이 될 수도 없었을테니까요. (04/03/02)

★★☆

기타등등

일 마레는 촬영 후 태풍에 쓸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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