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곡성 (1986)

2010.01.31 11:18

DJUNA 조회 수:6724

감독: 이혁수 출연: 김기종, 서인수, 이계인, 김윤희 다른 제목: Woman's Wail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곡성]은 평론가들의 도움없이 자체적인 팬을 확보한 몇 안되는 옛 한국 영화입니다. 의심나신다면 인터넷을 한 번 검색해보세요. 80년대에 나온 한국 영화들 중 [여곡성]처럼 영화 파일이 많이 돌아다니는 작품이 얼마나 되나요?

[여곡성]의 명성은 어느 정도 기억과 소문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이 영화를 접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곡성]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접하기가 쉽지 않자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이 퍼트린 소문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고 그만큼이나 관심도 커졌죠. 그러는 동안 영화가 컬트 팬들을 모으게 된 것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고요.

[여곡성]은 이름값을 하는 영화일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만약 이 영화를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라고 생각하고 계시고 그 기억을 소중히 여기신다면 다시 보지 마세요. [여곡성]은 더 이상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적당한 자극과 80년대 한국 호러 영화들의 유치한 느낌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여곡성]은 여전히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여곡성]은 전통적인 [전설의 고향] 호러입니다. 몰락해가는 양반댁에 옥분이라는 처녀가 막내 며느리로 팔려옵니다. 시아버지는 실성해서 광에 갇혀 있고 아들들은 결혼하자마자 죽어나가니 결코 편하게 시집살이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죠. 망해가는 집안 꼴은 월아라는 처녀의 원혼 때문이었으니, 이 잘나빠진 시아버지란 작자가 젊었을 때 자기 아이를 임신한 월아를 살해했단 말이에요. 나중에 원혼을 위로한답시고 묘자리를 마련해준 모양인데 여러분 같으면 그것 가지고 성이 차겠습니까?

옥분이 시집오면서 이 집안에 약간의 희망이 들어옵니다. 옥분의 남편은 월아에게 살해당했지만 옥분은 이미 남편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곧 부계 혈통을 이으려는 처절한 노력이 시작되고, 이를 눈치챈 월아의 귀신은 반격에 나섭니다. 시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이 시어머니로 변장해 들어와 혈통을 확실하게 끊어놓으려 하는 거죠. 하지만 가슴에 卍자 낙인이 찍힌 옥분은 쉽게 상대할 수가 없군요.

[전설의 고향]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조선시대의 짜증나는 성차별적인 계급 사회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여자들에게 동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입장 자체는 비교적 불분명해요. 월아의 유령은 당연한 복수를 하고 있지만 상관없는 집안 여자들과 고용인들까지 싹쓸이 하는 월아의 학살극에 그렇게까지 감정이입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거든요.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하는 대상은 새로 온 며느리 옥분입니다. 그 결과 영화는 무시무시한 팜므 파탈 월아와 전통적인 여자 주인공 옥분의 일대일 대결로 끝나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황량합니다. 아무리 80년대식 '토속 섹스'와 '해학'을 깔아도 주인공만 빼고 전원이 몰살당하는 결말은 참으로 암담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 죄도 없이 남의 집에서 과부로 얹혀 살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가는 며느리들은 그냥 딱하기만 하고요. 그나마 통쾌한 건 시아버지가 월아 때문에 고생고생하다가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걸 구경하는 것입니다.

[여곡성]에서 가장 재미있는 설정은 원한씹는 처녀귀신의 복수담과 고부간의 갈등 이야기를 결합한 것입니다. 둘이 얽히는 건 당연하다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원한씹는 처녀귀신이 변장한 시어머니인 걸요. 덕택에 이 영화의 시어머니는 젊은 여인의 욕망과 노인네의 권력을 모두 휘두르는 흥미로운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곡성]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로 기억하는 진짜 이유는 보다 단순합니다. 이 영화는 은근히 사람들의 기억에 쉽게 남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많이 갖추고 있거든요. 무서운 시어머니부터 전형적인 긴 머리 처녀귀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중년 아줌마가 무시무시한 뱀파이어처럼 분장을 하고 나타나 생닭의 피를 마시거나 며느리의 목을 물어 뜯으니까요. 지렁이를 국수인 줄 알고 맛있게 먹는 시아버지의 모습(쌤통이죠)처럼 징그러운 장면이나, 제목에도 나오는 여자 귀신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처럼 전통적인 [전설의 고향] 호러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고요. 깔깔거리며 신나게 볼만한 유치찬란한 장면들도 많습니다. 옥분의 가슴에서 발사되는 우뢰매 광선을 기억하세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텔레비전으로 봤을 때 더 무섭고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야한 장면들을 적당히 잘라버린 텔레비전 버전은 오리지널보다 덜 지루하고 작은 화면을 꽉 채운 팬앤스캔 버전 뱀파이어 시어머니의 모습은 옆에 훤하게 여백을 남긴 스코프 버전의 시어머니보다 훨씬 압도적이거든요. 원래의 화면비율을 지킨 DVD가 나온다고 해서 이 영화의 인기에 특별히 큰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아요. (04/10/05)

★★☆

기타등등

시어머니 귀신이 괜히 뱀파이어처럼 피를 빠는 장면이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는데, 그만큼 해머 영화사의 [드라큘라] 영화들이 우리나라 호러 영화에 끼친 영향이 컸던 모양입니다. 처녀 귀신들도 모두 핑계를 만들어 뱀파이어 이빨들을 달아야 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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