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1967)

2010.03.14 00:06

DJUNA 조회 수:3522

감독: John Boorman 출연: Lee Marvin, Angie Dickinson, Keenan Wynn, Carroll O'Connor, Lloyd Bochner, Michael Strong, John Vernon, Sharon Acker, James Sikking

1962년, 미국의 추리작가 도널드 웨스틀레이크는 리처드 스탁이라는 필명으로 [Hunter](우리나라에서는 동서추리문고에서 [인간사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범죄소설을 썼습니다. 파커라는 전문 범죄자가 자신을 배반한 동료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이 작품은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웨스틀레이크는 원래 끝에 죽이려 했던 이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 소설들을 연달아썼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면, 전 파커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엔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냉혈한 전문 도둑이 늘 교활하게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내용이 어느 정도 혁명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전 [인간사냥]만 읽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혐오스러워요. 전 그의 악행을 삐딱하게 즐길 수도 없고 그에게 몰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그럴만한 가치도, 매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파커의 초상은 당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던 60년대 독자들에게 음울한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시대를 그럴싸하게 타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쓰레기 악당이 규율파괴와 자유, 혼란의 상징이 된 것이죠. 존 부어맨도 이 책에서 그런 가능성을 읽었던 독자들 중 한 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포인트 블랭크]는 [인간사냥]을 각색한 첫번째 영화이니까 말이에요. (두 번째 영화는 브라이언 헬겔런드의 [페이백]입니다.)

영화는 폐쇄된 알카트리즈 감옥에서 한탕을 벌이던 중 동료 리즈에게 총을 맞은 워커라는 악당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아내와 돈을 빼앗은 리즈에게 복수하기 위해 LA로 오죠. 하지만 아내 린은 워커와 재회한 다음 날 자살하고, 리즈는 이미 기업체형 거대 범죄 조직의 일원입니다. 워커는 린의 동생 크리스의 도움을 받아 조직과 리즈에 도전하죠.

줄거리만 검토해보면 [포인트 블랭크]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각색물입니다. [인간사냥]의 더럽고 차가운 느낌은 비교적 온건하게 윤색되었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 워커는 파커만큼 매정한 범죄기계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터프하고 무도덕적이지만 파커만큼 잔인하지도 않고 희미하게나마 양심도 있습니다. 비중있는 여자 캐릭터가 전무한 원작이 심심하다고 느꼈는지, 영화는 린의 동생 크리스라는 인물을 만들어 꽤 큰 비중의 스토리 라인을 넣어주고 있습니다.

굉장히 뻔한 각색처럼 들리지만, 결과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존 부어맨은 웨스틀레이크의 원작을 적당히 약화시킨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인간사냥]은 간결하고 명확하고 냉정했습니다. 하지만 [포인트 블랭크]는 꿈결같이 모호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모든 게 분명하게 맺어지고 끝나는 원작에서와는 달리, [포인트 블랭크]에서는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사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한마디로 정체불명입니다. 원작에서 파커의 복수는 이치에 맞았습니다. 친구 맬 레스닉에게 복수하고 조직을 털어 자기 몫을 되찾는 것이죠. 하지만 영화에서 이 분명한 동기는 해체됩니다. 원작에서 파커는 복수의 쾌감을 온몸으로 즐기며 친구를 교살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리즈는 별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실랑이 도중 실수로 추락해 죽습니다. 원작에서 파커가 조직과 대항하는 이유는 순전히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워커는 마치 죽기 직전에 머리에 남은 기억을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좀비처럼 그냥 움직입니다. 조직의 핵심 인물들을 번갈아 따라다니면서 자기 돈을 달라고 떼를 쓰는 그의 모습은 정말 좀비같아요. 물론 꽤 똑똑한 좀비지만요. 전체적으로 영화의 스토리는 실제 세계의 동기보다는 막연한 꿈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부어맨은 이런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흐려놓습니다. 원작에서 파커는 지옥에서 돌아온 악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워커가 누비는 LA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특별히 무서운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현실의 느낌이 결여되어 있지요. 인간의 흔적이 제거된 콘크리트 구조물 안이건, 필름 이미지가 배경에 번뜩거리는 클럽이건요. 이 악몽같은 공간을 맥없이 방황하던 워커는 중간에 목적도 동기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는 일관된 시간의 감각까지도 잃어버립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끊임없이 삽입되는 과거의 회상 때문에 이 영화는 좀비의 꿈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영화 전체가 워커의 꿈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마 실제로 그는 알카트리즈에서 죽었겠지요. 영화의 아방가르드 풍 스타일을 고려해보면 그게 더 이치에 맞아요. 그는 유령일 수도 있습니다. 우린 그가 어떻게 알카트리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는 자기 손으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습니다. 모두들 귀신들린 것처럼 그의 존재를 느끼면서 서로를 죽여대는 거죠.

어느 쪽이 사실이건, 그 결과 존 부어맨의 영화는 불쾌한 영화적 꿈이 되었습니다. 구식 갱들을 몰아낸 기업형 범죄 조직이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주인공을 지배하는, 통제불능에 어떤 욕구과 환상도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는 기분나쁜 악몽의 공간 말입니다. (04/05/20)

★★★☆

기타등등

파커 시리즈는 이후에도 여러 번 영화화되었습니다. 로버트 듀발이 [The Outfit]에서, 피터 코요테가 [Slayground]에서, 멜 깁슨이 [페이백]에서 이 악당을 연기했었죠. 하지만 그 중 파커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영화는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파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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