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를 베어라 (2006)

2010.02.05 23:54

DJUNA 조회 수:3097

감독: 민병훈 출연: 서장원, 기주봉, 이민정, 이호영, 홍대성, 이남희, 성열석, 정석용 다른 제목: Pruning The Grapevine

민병훈의 첫 한국어 장편인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비교적 드문 종류의 한국 영화입니다. 미신적인 일반화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는 가톨릭 영화죠. 명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는 러시아 문화권에서 빌려온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 카테고리가 양질의 영화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건 기쁜 일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수현은 모범적인 가톨릭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머리 좋고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에 열심인 신학도지만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고 인격적으로도 아직은 완전히 무르익어 있지 못하죠. 한 마디로 아직 겁에 질린 앱니다.

수현이 끌어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한 편은 아닙니다. 가톨릭 신학 대학의 생활을 다룬 전반부에서 수현은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옛 여자친구에 대한 감정과 흔들리는 믿음 때문에 고민합니다.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려 하지만 학장 신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수도원 피정을 떠나죠. 거기서 그는 여자친구 수아와 꼭 닮은 헬레나라는 견습수녀를 만나는데, 헬레나에게도 거의 그와 맞먹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멜로드라마틱할 수 있고, 실제로 영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정의 멜로드라마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차이점과 장점이 있다면 그 멜로드라마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죠. 헬레나의 고백으로 영화가 깔아놓은 도플갱어 설정의 극적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난 뒤에도 '할렐루야!' 합창 따위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멜로드라마는 종교와 믿음의 강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진무구한 젊은이를 더 헛갈리게 만들 수도 있는 신의 윙크에 가깝죠. 신앙과 종교, 삶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의 어투는 은근히 가벼워요. 아마 민병훈은 더 가벼운 영화를 생각했을 거예요. 영화 중반에 늙은 외국인 수사가 웅얼거리는 '깃털처럼 가볍게'는 거의 이 영화의 모토거든요.

영화 전체가 다 그래요. [포도나무를 베어라]의 기본전략은 간단합니다. 일단 될 수 있는 한 아주 사실적으로 성직자들과 신학도들의 일상을 묘사합니다. 그러는 동안 관객들이 이 소재에 대해 품고 있는 장르적인 편견들이 떨려나가죠. 이렇게 해서 준비가 되면,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그 이야기들은 모두 은근슬쩍 인과가 끊겨 있고 당연히 나와야 할 설명들도 제거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 게 아니거나 어처구니 없는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의미를 부여받지요. 물론 영화는 분명한 결말을 내는 귀찮은 짓도 하지 않습니다. 벌려놓은 걸 수습하지 않으면 의미가 더 커지니까요. 뻔한 해결책이지만 잘 먹히니까 다들 쓰는 거죠.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느리고 신중한 영화지만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명상적인 종교 영화라고 꼭 무거워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영화는 예상보다 유머가 풍부하고, 슬슬 알코올 중독자 기미를 보이는 문신부에서부터 이웃 수녀원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빠져 있는 수련수사 정수에 이르기까지 캐릭터 묘사도 다양합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절제와 금욕이 만들어내는 은근슬쩍 섹시한 분위기도 꽤 살아있고요. (07/02/23)

★★★☆

기타등등

수현과 헬레나의 이야기는 민병훈 감독이 아르메니아에서 직접 겪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더군요. 솔직히 저에겐 실제 이야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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