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들의 아침 (2018)

2018.12.10 07:19

DJUNA 조회 수:5495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제가 본 영화들 중 여자중학생이 주인공인 영화가 세 편이나 되었습니다. [시체들의 아침], [보희와 녹양], [벌새]. 중학생 나이의 캐릭터는 영화에서 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좀 신기했어요.

이승주의 [시체들의 아침]은 올해 가장 인기있었고 입소문도 만만치 않았던 단편영화 중 하나입니다. 감독의 전작 [죽부인의 뜨거운 밤]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지요.

영화의 주인공은 실패한 호러영화감독 성재입니다. 성재는 이사 가기 전에 집에 갖고 있던 DVD 콜렉션을 모두 처분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민지라는 여자아이가 성재의 콜렉션 중 조지 A.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의 특별판 DVD 세트만 사겠다면서 찾아옵니다. 성재는 낱개 판매는 거절하지만 이미 로메로 좀비 영화 전작을 마스터했고 아르젠토가 편집한 유럽 개봉판만 보겠다는 민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잠시 방과 텔레비전을 빌려주지요.

민지의 캐릭터에겐 좀 믿음이 가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조지 A. 로메로의 팬인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는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며, 그 아이와 톰 새비니의 특수 분장과 카메오 출연에 대해 수다를 떨면 한없이 즐겁겠지요. 하지만 지금 막 중학생 나이에 접어든 아이의 취향이 향수 젖은 DVD 세대 호러 영화팬과 같을 것이라고, 그 아이가 [시체들의 새벽]을 그 호러팬들과 같은 눈으로 볼 거라고는 믿지 못하겠어요. 한동안 잔혹 묘사의 극단을 달렸다는 평을 들었던 로메로의 좀비 영화는 더 이상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아요. 고백하지만 DVD 세대들에게도 그렇게까지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지요. 성재는 [부산행]의 좀비 묘사를 비웃었지만 [부산행]을 본 관객이라면 로메로의 삼부작은 그냥 쉽게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아이는 좀비 영화와 물리 매체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 취향의 충돌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박서윤 배우의 생기발랄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민지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오로지 중년에 접어드는 특정 취향을 가진 남자 영화광의 백일몽 속에서만 안전하고 해없게 존재해요. 그러고보니 역시 남자 영화광과 그 남자의 희망을 물려받는 여자아이의 관계를 다룬 재미있는 단편영화가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한 편 더 있습니다. 조현민의 [종말의 주행자]라는 작품인데, 주변의 모든 것을 영화처럼 해석하는 주인공 영화평론가는 여자아이가 등장하자마자 “클리셰!”라고 외치죠. 물론 그가 그걸 인식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스테레오타이프에 빠지는 걸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의 아침]은 세 편의 영화 중 지금의 저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공감되었던 영화입니다. 이전까지 제목과 입소문만 들었던 호러 고전을 DVD를 통해 접했던 호러 장르 팬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요. 자신의 물리 매체와 장르에 대한 사랑이 영화 속에서나마 다음 세대의 영화광에게 전달된다니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을 수가 없지요. (18/12/10)

★★★

기타등등
민지로 나오는 박서윤 배우는 [벌새]에도 나와요.


감독: 이승주, 배우: 강길우, 박서윤, 다른 제목: Morning of the Dead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427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882 성적표의 김민영 (2021) DJUNA 2022.09.08 1928
1881 블랙폰 The Black Phone (2022) DJUNA 2022.09.07 1758
1880 다시 만날 때까지 I'll Be Seeing You (1944) DJUNA 2022.09.06 1012
1879 스펠 Spell (2020) DJUNA 2022.09.05 1480
1878 폭찹 고지전투 Pork Chop Hill (1959) DJUNA 2022.09.04 993
1877 키미 Kimi (2022) DJUNA 2022.09.03 1299
1876 노스맨 The Northman (2022) [1] DJUNA 2022.09.02 2641
1875 리미트 (2022) DJUNA 2022.09.01 1401
1874 베스티스 Les Meilleures (2021) DJUNA 2022.08.31 1049
1873 씨씨 Sissy (2022) DJUNA 2022.07.25 3570
1872 잘라바 Zalava (2021) [1] DJUNA 2022.07.25 1758
1871 헤어질 결심 (2022) [2] DJUNA 2022.07.18 8071
1870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 Jurassic World Dominion (2022) DJUNA 2022.06.04 4809
1869 더 노비스 The Novice (2021) DJUNA 2022.06.02 2543
1868 매스 Mass (2021) DJUNA 2022.06.01 2397
1867 평평남녀 (2021) DJUNA 2022.05.16 2765
1866 파리, 13구 Les Olympiades (2021) DJUNA 2022.05.15 281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