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0 00:56
이석훈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올해 여름 한국영화들 중 가장 망작일 거라고 예상되어 왔던 영화입니다.
국새를 삼킨 고래를 쫓는 해적 이야기라니, 저라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무리 봐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데다가 [캐리비언의 해적]을 흉내낸 티가 너무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별 기대없이 봤는데, 그렇게 망작이거나 괴작은 아니었습니다. 예상 외로 꽤 멀쩡했어요.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조선 미녀 삼총사] 같은 수준은 아니었던 거죠. 심지어 국새를 삼킨
고래라는 설정도 허공에서 뚝 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여전히 황당한 설정이긴 하지만.
결코 잘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구성이 산만하고 내용도 정신없기 짝이 없거든요.
'국새 삼킨 고래를 잡아라'라는 명쾌한 목표를 주었는데도 이야기는 사방팔방 흩어져서
기승전결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코미디로 그렇게 재치나 유머가
뛰어난 편이 아니라 대부분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고요. 액션은 무난하지만
특별히 튀는 편이 없고 몇몇 장면은 예상했던 대로 [캐리비언의 해적]에서 슬쩍
빌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의도와 상관없이 영화와 맞습니다. 국새를 쫓는 사람들이 나오는 '웰메이드' 각본의 조건의
무엇인가요. 이유는 다를 수 있어도 영화의 중요인물들 모두가 그 국새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동들이 정리되고 모아지죠. 하지만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국새는 조연 몇 명의 관심사일 뿐입니다. 주인공들도 그걸 찾으면 사는 게 편해지긴 하겠지만,
그냥 그 뿐입니다. 이건 잘못된 설정이 아닙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일반적인 사극영화의 가치관이 멸시당하거나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조선건국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된 조연 몇 명뿐입니다. 해적두목인 여월은 나라가 바뀌건, 바뀌지 않건 관심이
없습니다. 위화도 회군 때 열받아 군대를 떠난 산적두목 장사정은 이성계가 하는 일에
영 불만이고요. 작가 역시 이성계와 그의 동료들에게 냉소적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고래 뱃속에 들어있는 국새를
찾는다는 임무 자체가 별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니까요. 아 영화의 각본에 반영된 가장 중요한 투쟁은
'누가 먼저 국새를 찾느냐'가 아니라, 어떻게든 주인공을 '국새 찾기'라는 미션으로 몰고가려는
힘과 그 집중을 막으려는 힘의 대결입니다. 다시 말해 웰메이드한 구성의 파괴는 그 자체가
드라마인 것입니다.
영화의 무정부주의와 냉소는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꽤 드문 편이라 이걸 보다 적극적으로
밀고 갔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럴 배짱이 없었는지 영화는 결국 후반부에
진지함과 타협을 하더군요. 맥이 풀립니다. 배짱도 배짱이지만, 주인공들이 거기까지 가지 못한
건 아무래도 상상력의 한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조선건국의 역사와 환경주의의 결합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고래가 국새를 삼켰다'는 물론 농담이지만
이 설정은 훨씬 큰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조선 건국에는 쥐뿔만큼의 관심도 없는 거대한
자연과 건국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대립을 상상해보세요. 하지만 영화는 이 대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모성과 보은과 같은 인간 가치를 미끼로 고래를 인간 세계로 끌어들입니다.
이 역시 시시한 타협이죠. 이런 식의 타협을 할 때마다 영화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기억에 남을 괴작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산만함 같은 걸 수정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웰메이드 각본'을 만들었어도 기껏해야 흔한 [캐리비언의 해적] 짝퉁에 머물렀겠죠.
전 그 가상의 '웰메이드' 영화보다 적당히 파편화된 지금 모습이 나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지나치게 길고 페이스도 늘어지며 로맨스는 쓸데없지만, 여기엔 이런 종류의 한국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심술궂은 재미가 있어요.
(14/08/10)
★★☆
기타등등
액션 사극 영화에 어색하지 않게 여성 주인공을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여월의 경우는 말이 됩니다.
역사책을 뒤져보면 의외로 여성 해적 두목들이 꽤 되거든요.
감독: 이석훈, 배우: 손예진, 김남길, 유해진, 이경영, 오달수, 김태우, 박철민, 신정근, 김원해, 조달환, 조희봉, 정성화, 설리, 이이경, 다른 제목: The Pirates
IMDb http://www.imdb.com/title/tt348516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7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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