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13 14:04
에롤 모리스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국내 방영 제목은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 원제는 [Wormwood]입니다. 언제나처럼 다큐멘터리지만 '순수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닙니다. 일단 영화가 아니라 넷플릭스 6부작 시리즈예요 (모리스는 시리즈 대신 스토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재현장면이 들어갑니다. 재현장면이 들어간 다큐멘터리야 흔하지만 모리스는 이 장면을 피터 사스가드, 몰리 파커, 팀 블레이크
넬슨, 밥 발라반과 같은 일급배우들을 동원해 아주 진지하게 찍었습니다. 무게중심이 다른 거죠.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
부분에서 후보로 못 오릅니다.
제목의 세균학자는 프랭크 올슨입니다. 정부 음모론을 파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이름이죠. CIA에서 일하던 민간인 과학자였는데, 1953년에 뉴욕의 호텔
13층 객실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있었던 파티에서 CIA가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LSD가 든 음료를 마시게 했고 그 영향하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예요. 이것만으로도 논란이 되기 충분하잖아요. 하지만 이 '스토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있고 더 음험합니다.
심지어 LSD 이야기도 추리소설에 자주 나오는 가짜 단서이고 그 밑에는 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는 거죠.
[가늘고 푸른 선]처럼 추리물입니다. 단지 모리스의 위치가 조금 다르죠. [가늘고 푸른 선]은 감독과 카메라가 일인칭 하드보일드 사립탐정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에서 탐정 역은 프랭크 올슨의 아들 에릭이 맡고 있습니다. 모리스와 카메라는 홈즈 역을 맡고 있는 에릭의 추리를 들어주는
왓슨의 역할이죠. 아니면 호레이쇼. 이 작품에서 모리스는 의도적으로 [햄릿]의 테마를 작품 곳곳에 삽입하고 있으니까요. 제목인 [Wormwood]도
3막 2장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에서 따온 것입니다(우리나라 번역본에서는 그냥 "쓰구나!" 또는 "소태처럼 쓰구나!" 정도로 번역하고 있어요).
[햄릿]처럼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도 아버지의 죽음에 집착하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햄릿]만큼 피가 튕기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잔인합니다. 햄릿의 이야기야 기껏해야 며칠이면 끝이 나고 결말엔 모든 진상이 밝혀지잖아요. 하지만 1953년에 시작된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미해결입니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잡아먹은 기나긴 수사의 이야기예요. 물론 미해결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에릭 올슨과 몇몇 사람들은 다큐멘터리에서 밝히지 않는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햄릿]과 같은 수준의 해결은 어림없죠. 하긴 지금 다 해결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관련인물들은 다 죽었는데. 그 중 몇몇은 아주 수상쩍은 상황에서요.
[가늘고 푸른 선]에서와는 달리 모리스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해답을 찾지는 않습니다. 재현장면은 그 할리우드 영화적인 특성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을
통해 접근한 허구의 티가 노골적입니다. 모리스가 밝히려는 것은 살인사건일 수도 있는 죽음의 진상이 아니라 냉전시대 미정부와 정보기관들이 만들어낸
미로 자체, 그리고 그 미로에 갇혀 평생을 보낸 한 남자의 초상이죠. 네, 쓰디쓴 이야기입니다.
(18/01/13)
★★★☆
기타등등
에릭 올슨은 여러 면에서 에롤 모리스 자신과 닮았어요.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 Errol Morris, 배우: Eric Olson, Peter Sarsgaard, Christian Camargo, Scott Shepherd, Tim Blake Nelson, Bob Balaban, Molly Parker, 다른 제목: 웜우드
IMDb http://www.imdb.com/title/tt730605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7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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