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흥미로운 독일어권 실존여성에 대한 전기영화들을 만들고 있는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라는 새 전기물을 들고 왔습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시인이고 소설가인 잉게보르크 바흐만. 이 영화에서는 비키 크립스가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에 차경아가 대표작을 꾸준히 번역했기 때문에 당시 국내에도 독자가 많았습니다. 이문열의 소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도 바흐만의 싯구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이건 당시 한국에 어떤 문학이 번역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지요.

바흐만의 일생 전체를 다 보여줄 수는 없고, 당연히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데, 영화는 두 시기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흐만이 스위스 작가 막스 프리슈와 동거하던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흐만이 프리슈와 헤어지고 아돌프 오펠과 이집트 사막 여행을 가던 때입니다. 두 시간선은 번갈아 진행되는데 아무래도 두 번째가 첫 번째 이야기를 감싸는 액자 구실을 하고 있지요. 여러 모로 [오펜하이머]가 떠오르는 구성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중간중간에 유명한 사람들이 툭툭 등장하는 것도 닮았어요.

당연히 고통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바흐만과 막스 프리슈의 관계는 개성 강한 두 예술가가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건 영화 속에서 바흐만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고, 우린 마르가레타 폰 트로타가 한 동안 폴커 슐렌도르프와 부부사이였다는 걸 떠올리게 되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 일반론에서 벗어나 이 커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세밀하게 팝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점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술가의 착취적인 성향입니다. 바흐만과 프리슈는 예술가로서 작업방식이 다른데, 바흐만이 자기성찰적이라면 프리슈는 주변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는 스타일입니다. 이건 굉장히 좋게 말한 것이고, 한마디로 뱀파이어처럼 주변사람들을 착취하는 스타일이죠. 그러니까 "절대로 소설가와 연애하지 말아라"의 바로 그 소설가입니다. 바흐만은 프리슈가 자신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 관계엔 균열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개별 예술가의 개인사로 머무느냐. 당연히 아니죠. 이건 자연스럽게 가부장사회를 사는 이성애자 여성이 얼마나 골때리게 힘든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고 사실 영화 전체가 그 이야기입니다. 이 시스템은 바흐만과 프리슈의 관계를 설정하기도 하지만 남성위주의 독일 문단 전체가 그 모양입니다. 폰 트로타는 바흐만이 강연을 할 때 거의 대부분이 검은 양복을 입은 중장년 남자들인 청중을 보여주는데 그 그림은 거의 초현실주의적 호러 같습니다.

이 갑갑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숨을 틔워주는 게 사막 여행입니다. 서구 부르주아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건 제1세계 사람이 제3세계로 와서 치유된다는 이야기의 틀을 따르고 있어서 좀 재수가 없는 구석이 있습니다. 거기도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삶이 있고 제1세계 사람들은 자기만의 특권으로 이걸 슬쩍 무시하며 자유를 누리는 건데. 이걸 잘 보여주는 게 이집트 남자 둘, 아돌프 오펠과 함께 하는 섹스신이 아닐까요. 하지만 압도적인 자연의 존재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리고 이 틀이 없었다면 바흐만 + 프리슈 이야기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찰할 수 없었겠죠.

'좋아하는 작가의 일생과 언어를 좋아하는 배우가 재현한다'라는 조건이 맞는 관객에게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저도 그 관객 중 한 명인 것 같고요. 하지만 가끔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작가가 남긴 텍스트를 재구성한 대사를 읊는 전기 캐릭터는 작가의 언어를 학습한 인공지능 챗봇과 얼마나 다른 걸까요. (23/09/05)

★★★

기타등등
바흐만의 죽음을 직접 보여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침대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종종 보여주고 촛불에 드레스가 불타는 장면도 한 번 나옵니다. 바흐만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관객들은 이 장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감독: Margarethe von Trotta, 배우: Vicky Krieps, Ronald Zehrfeld, Tobias Resch, Basil Eidenbenz, Marc Limpach, Luna Wedler, Renato Carpentieri, 다른 제목: Ingeborg Bachmann – Journey into the Desert

IMDb https://www.imdb.com/title/tt16103266/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7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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