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 카르모나의 [내 여자친구의 여자친구]는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인데, 저는 표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비에서 틀어주고 있더군요. 그래서 그냥 영화제에서 보는 것이라고 분위기를 잡으며 영화제 기간에 무비에서 보았습니다.

척 봐도 제목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서 따온 것입니다. 영화는 여러 면에서 로메르를 패러디하고 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꾸준히 로메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등장시킵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 하나는 [녹색 광선]이 상영되는 상영관 안에서 벌어집니다.

당연히 영화의 주인공은 시네필, 그것도 영화감독 지망생입니다. 심지어 감독과 이름이 같고 감독 자신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영화의 주인공 사이다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 사람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바르셀로나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 이건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니며 1시간 반도 안 되는 이 짧은 영화가 끝날 무렵엔 영화 속 인간관계가 고양이가 갖고 논 털실뭉치처럼 얽혀 있습니다. 다행히도 사이다는 영화 말미에 이 모든 관계를 비교적 깔끔하게 요약정리합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덜 복잡해지느냐?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만.

영화 속 바르셀로나는 괴상한 곳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세계엔 남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멀리 지나가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감독이 없앨 수 있었다면 없애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갑자기 중간에 대사와 얼굴이 있는 남자가 한 명 나와서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는데, 그건 이 영화의 공동각본가인 마르크 페레르입니다. 이 사람이 퇴장하면 곧 여자들, 그것도 예술하는 젊은 퀴어 여성들로만 구성된 세계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로메르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관객석에 오로지 여자들만 앉아 있는 그림을 보면 웃기면서도 약간 오싹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술영화관에 여자들만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건 아니군요.

영화는 좀 자학농담입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 특히 예술가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관련된 온갖 스테레오 타이프들이 총동원되고 영화는 내부자 관점에서 이를 놀려댑니다. 공격적인 농담은 아니에요. 종종 자신이 놓인 상황에 몸서리치고 징그러워하고 수치스러워 하지만 사랑과 우정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없는 이 세계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역시 감추지 않으니까요. (23/09/07)

★★★

기타등등
스페인 가수 크리스티나 로센빙게가 자기 자신으로 나옵니다.


감독: Zaida Carmona, 배우: Zaida Carmona, Alba Cros, Thaïs Cuadreny, Aroa Elvira, Marc Ferrer, Christina Rosenvinge, Rocío Saiz, 다른 제목: Girlfriends and Girlfriends

IMDb https://www.imdb.com/title/tt19513160/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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