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2011)

2011.07.29 18:49

DJUNA 조회 수:17375


[블라인드]에서 김하늘이 연기한 수아는 뺑소니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집에 가려고 탄 택시가 누군가를 치었고, 그 차는 수아를 내버려두고 달아나 버렸는데, 그 운전사는 두 사람 이상을 살해한 연쇄살인마일 가능성이 큽니다. 수아는 이 차와 운전사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수아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죠. 수아가 가진 정보는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사자인 수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종합해 의미를 만들어내야 하지요.

 

여기서부터 저는 살짝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블라인드]의 도입부는 [어두워질 때까지]보다 [맹인탐정 캐러더스]에 훨씬 가까워요. 실제로 수아는 교통사고로 실명하기 전에 경찰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이 캐릭터는 영화가 끝날 무렵, 자신의 특수한 재능을 활용하는 명탐정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보니, 정말 영화의 추리물적 밀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냥 천재 시각장애인이 모든 걸 꿰뚫어보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반대로 수아는 사건을 맡은 조형사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면서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조금씩 올바른 방향을 잡아갑니다. 그 각각의 단계마다 중요한 교훈을 얻어가면서요. 군데군데 설명이 필요한 구멍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과정은 상당히 정확하며 담겨있는 의미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마디로 좋은 추리영화란 말입니다.

 

그 교훈의 첫 단계가 사건의 또다른 목격자인 기섭이라는 소년과의 만남입니다. 기섭은 수아가 종합한 정보와는 모순되는 다른 목격담을 들려주고 여기서 대립이 시작됩니다. 추리영화로 [블라인드]를 보았을 때, 기섭은 추리 과정의 중간단계입니다만, 이 영화는 한국화된 스릴러이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냥 추리과정의 디딤돌로만 남지는 않지요. 둘이 같이 지내는 동안 수아는 기섭에게서 교통사고로 죽은 보육원 동생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의 누나 노릇을 하며 죄책감을 해소하려 합니다. 조금 억지이고 많이 간질간질합니다. 그래도 [퀵]처럼 자기가 사람을 죽였건 말건 상관없이 랄라거리며 사는 인간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들이 과거의 실수에 대해 정상적인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를 만나니까 안심이 되더군요.

 

추리와 함께 진행되는 스릴러는 비교적 정통적이며 익숙합니다. 특정 결말로 몰아가기 위해 무리하는 부분도 종종 있어요. 하지만 영화는 꾸준히 시대에 맞는 새 아이디어들을 이야기 속에 넣고 있고 액션을 끌어가는 모범적인 리듬감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아, 기섭, 조형사는 이 상황에서 올바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가끔 어리석게 굴기도 하고 종종 실수도 하지만 머리를 쓸 줄 알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인식하고 있고 심지가 곧은 사람들이죠. 그리고 그들의 대척점에 선 악당은 별다른 과장 없이 자기 일만 해도 위험하게 느껴지는 인물로 역시 제대로 된 상대입니다.

 

전작이 한 없이 어이없었던 [아랑]이었다는 걸 고려해본다면, 안상훈에게 [블라인드]는 엄청난 발전입니다. 한국 장르 영화 특유의 과장된 스타일이 남아 있는 걸 감안하고 봐야 하지만, 김하늘, 유승호, 조희봉 그리고 '동물배우계의 김혜자 여사'인 달이는 모두 캐릭터에 맞고 제대로 기능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물론 저 같으면 멜로드라마와 장애인 편견에 대한 설교를 조금 잘라내고 그 시간에 추리를 조금 더 다듬겠지만,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한국 관객들의 취향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있겠죠. 그리고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일어난 안내견 소동을 생각해보면, 그 설교들을 지우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우린 정말 [블라인드]가 그린 그 따위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11/07/29)


★★★


기타등등

살인범의 직업에 대해서는 조금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든 사람들의 기독교적 관점이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범이 그 직업에 종사하는 동안 바로 그 '도덕적' 관점을 받아들여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불쾌한 건 마찬가지지만요.

 

감독: 안상훈, 출연: 김하늘, 유승호, 조희봉, 양영조, 달, 다른 제목: Blind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Blind.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9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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