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2011)

2011.04.22 10:09

DJUNA 조회 수:22985


소위 '강형철의 칠공주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던 [써니]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중년의 아줌마들이 80년대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으러 다니는데, 그러는 동안 80년대와 10년대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고요. 물론 에피소드 위주이고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보기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칠공주라니 캐릭터가 일곱 명입니다. 80년대와 10년대가 번갈아 나오니 관리해야 할 배우가 자그마치 14명입니다. 2시간 정도의 러닝 타임 안에서 이들 모두에게 구별할 수 있는 개성과 스토리를 주어야 하는 겁니다. 거의 서사시적인 노력이 필요하지요. 감독의 전작 [과속 스캔들]의 성공이 없었다면 성사 불가능한 계획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써니]에서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수월하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14명의 배우들을 구분하고 연결하는 데에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도 전혀 잡다해보이지 않고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두 시간대를 오가는 연결점도 유려하기 짝이 없고요.


이야기의 배합은 다른 한국 코미디와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신파 같죠.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지만 공허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인 나미는 엄마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속해 있던 서클 '써니'의 리더였던 춘화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들은 흥신소를 고용해 과거의 멤버들을 한 명씩 찾아내는데, 이들의 삶은 고등학교 때 꿈꾸었던 것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네, 인생에 실망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아줌마들 이야기인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신파가 아닙니다. 강형철은 익숙한 배합을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한국 장르 코미디의 함정들은 거의 모두 피해갑니다. 정확한 리듬을 따르고, 불필요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음악을 제대로 쓰고... 이 모든 건 [과속 스캔들]의 장점이기도 했지요. 단지 뻔한 이야기를 예상 외로 세련되게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었던 전작과는 달리, [써니]에서 이 장점들은 영화와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역시 80년대의 묘사에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정확한 시대묘사를 기대하면 곤란해요. 영화의 80년대는 '인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기억하는 중년 여인의 회상 속에서 다듬어지고 재조립되었습니다. 실제 80년대의 현실 속에서는 구질구질하게 방치되어 있었을 것들이 영화 속에서는 모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요.


80년대를 그리는 이 방식은 비정치적입니다. 전씨 성 가진 아무개의 얼굴이 텔레비전에 나오고, 운동권 캐릭터가 등장하고,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민주화 시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이를 굳이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80년대를 오로지 한 가지 관점으로만 바라보라고 강요하는 건 부당하죠. 그리고 영화의 비정치성이 과연 비정치적으로만 읽혀야 하는 걸까요? [터치 바이 터치] 장면 같은 건 조금 더 꼼꼼한 분석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교복자율화 세대에 대한 이런 회고적인 접근법은 조근석의 [품행제로]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단지 태도가 반대입니다. [품행제로]는 남자들이 만들어낸 허풍섞인 신화를 깨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써니]는 반대로 아줌마의 외피 밑에 묻혀 있던 여자들의 신화를 발굴해 복원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 복원 과정을 통해 주인공들은 막혀있는 삶에서 새로운 길을 찾죠.


이들의 묘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한 줄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만큼 단순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다양성은 기대를 넘습니다. 강형철의 각본은 평면적인 설명을 피하고 다양한 서브텍스트 읽기를 허용하는데, 그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려는 소모품으로 가볍게 쓰고 넘길 수도 있는 단역 캐릭터들에게도 미칩니다. 마지막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량소녀 캐릭터만 봐도 우리가 모르는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뒤에 감추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거의 서사드라마 몇 편을 채울만한 머릿수의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지만, 캐스팅은 훌륭합니다. 이들 모두가 배우로서 완벽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들의 앙상블에 대해서는 좋은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중엔 심은경처럼 처음부터 모두가 기대했던 배우들도 있고, 강소라처럼 예상 외의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내는 시너지입니다.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종종 욕심을 조금 더 부렸거나 덜 부렸다면 좋았을 부분들이 보입니다. 특히 지나치게 길어 보이는 결말은 다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써니]가 관객들과 캐릭터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양쪽 모두를 위해 최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지점을 찾아낸 멋진 대중영화라는 사실은 쉽게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11/04/22)


★★★☆


기타등등

1. '민효린 캐릭터의 성인역으로 누가 나오느냐'에 집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엄청난 캐스팅 스턴트 같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인공 나이 또래의 관객들이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카메오인 건 맞습니다. 


2. 저도 교복자율화 세대이니 이 시절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해달라는 말을 들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전 80년대를 주인공들만큼 좋게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전 앞으로 뭐가 올지도 모르면서도 제발 이 촌스러운 시대가 가길 바랐어요. 


3. 예상 못했는데, 이 영화에서 유호정과 심은경은 진짜로 닮았습니다.

 

감독: 강형철, 출연: 심은경, 강소라, 김민영, 박진주, 남보라, 김보미, 민효린, 유호정, 진희경, 고수희, 홍진희, 이연경, 김선경, 김시후, 천우희, 김영옥, 다른 제목: Sunny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Sunny_-_2010.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6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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