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미나의 기적 Philomena (2013)

2014.03.30 15:06

DJUNA 조회 수:9628


마틴 식스미스라는 남자가 누구인지부터 설명해야겠군요. BBC 기자였던 그는 블레어 정권 당시 교통부 홍보실장으로 일했는데, 2002년 스티븐 바이어스 교통부 장관의 홍보담당 특보 조 무어와 대판 싸우고 말았습니다. 무어가 9.11 이슈를 홍보에 좋지 않은 기삿거리를 덮는 커버용으로 이용하라는 메일을 보냈고 식스미스가 그에 반발한 게 싸움의 이유였죠. 바이어스는 두 사람의 사임을 발표했지만 식스미스가 사표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난리통. 결국 스핀게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린 스캔들로 발전했죠. 이게 [필로미나의 기적] 초반에 벌어지는 소동입니다.

[필로미나의 기적]의 원작인 [The Lost Child of Philomena Lee]는 그가 스핀게이트 이후에 쓴 여러 편의 책들 중 한 권입니다. [막달레나 시스터즈]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아일랜드 가톨릭 호러담에서 출발하지요. 주인공 필로미나 리는 품행불량하다는 이유로 수녀원에 끌려가 막노동에 시달리던 수많은 아일랜드 미혼모 중 한 명인데, 그만 수녀원에서는 필로미나의 아들 안소니를 돈을 받고 부유한 미국 부부에게 팔아넘겼습니다. 50년 동안 이 사실을 비밀로 묻어두고 있던 필로미나는 이 사실을 뒤늦게 딸에게 털어놓고,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식스미스는 이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결정하고 필로미나와 함께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게 2004년입니다.

컴컴한 도입부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컴컴합니다. 어린이 학대 같은 극단적인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필로미나와 아들이 감격의 해후를 하고 해피엔딩... 뭐, 이런 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사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로미나의 기적]은 코미디입니다. 굳이 코미디를 의도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요. 필로미나 리와 마틴 식스미스는 같이 있으면 코미디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평생을 간호사로 일해왔고 취미는 로맨스 소설을 읽는 거밖에 없는 소박한 아일랜드 할머니입니다. 다른 한쪽은 옥스포드를 졸업한 냉소적이고 심술궂은 상류층 지식인이고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서로의 신경을 긁으면서도 오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이 애보트와 코스텔로 같은 오래된 코미디 커플이 연상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장르 코미디에서처럼 고정된 역할에 머무는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 관객들은 필로미나에게 나이 든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의 편견을 기대하지만 반 세기 동안 현실세계에서 열심히 일해오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온 생활인인 필로미나는 오히려 그런 면에서 자유롭습니다. 식스미스의 동기도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회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요. 둘의 개성에는 자기만의 삶을 살아온 진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꼼꼼한 결이 있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이야기는 실화지만 거의 장르 추리소설처럼 다양한 반전들을 품고 있으며 이것은 거의 이상적인 결말로 연결됩니다. 각본이 원래의 이야기를 어떻게 재배치했는지 몰라도, 두 사람이 필로미나의 아들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 인생을 추적하고 묻혀있던 비밀을 폭로하는 과정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허구의 이야기처럼 신기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아일랜드와 미국 두 나라 모두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와 그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지요.

당연히 주디 덴치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영화입니다. 원래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덴치의 존재감과 합쳐지자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효과를 내죠. 여기서부터는 연기력을 따지는 것이 심심할 지경입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니까요. 모든 면에서 덴치의 그림자 밑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전 요새 스티븐 쿠건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가 그렇게 능숙하게 받아주지 않았다면 덴치의 매력도 지금만큼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티븐 프리어스가 감독한 영화지만 쿠건이 공동감독과 제작까지 맡았으니 이 영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프리어스보다 더 클 수 있어요. (14/03/30)

★★★☆

기타등등
1. 마틴 식스미스가 원작을 출판한 뒤 가디언에 쓴 필로미나 리에 대한 기사입니다. 스포일러 있어요. http://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09/sep/19/catholic-church-sold-child

2. 영화 개봉 이후 필로미나 리는 바티칸의 초대를 받아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습니다. 필로미나는 그 수녀들은 지금 자길 질투할 거라면서 신나했다고 하더군요. 하긴 저도 이보다 더 그럴싸한 복수는 상상이 안 갑니다.


감독: Stephen Frears, 출연: Judi Dench, Steve Coogan, Sophie Kennedy Clark, Anna Maxwell Martin, Mare Winningham, Barbara Jefford, Ruth McCabe, 다른 제목:

IMDb http://www.imdb.com/title/tt243128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8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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