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2012)

2012.11.14 23:45

DJUNA 조회 수:11061


이송희일이 세 편의 퀴어 연작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옴니버스 영화였대요. 하지만 어쩌다보니 첫 번째 에피소드인 [백야]의 러닝타임이 거의 장편 수준으로 길어져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백야]는 장편으로 떨어져 나갔지만 나머지 두 편인 [지난여름, 갑자기]와 [남쪽으로 간다]도 같이 개봉된다고 합니다. 외국에서는 원래 계획대로 하나의 제목으로 묶어 상영할 예정이고요.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대요.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이송희일은 계속 라틴어 단어인 coire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전 잘 모르지만, 감독에 따르면 이 단어는 성교라는 의미도 있지만 산책이라는 의미도 있답니다. 그리고 이 세 편 모두 같이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백야]는 원나잇 스탠드의 이야기입니다. 남자 A인 태준은 퀵서비스 배달부입니다. 남자 B인 원규는 한국을 떠난지 2년만에 잠시 돌아온 비행기 승무원이고요. 둘은 채팅방에서 사진을 교환하고 만납니다. 하지만 내내 재수없게 껌을 딱딱 씹어대며 화장실의 변태 섹스에 집착하는 원규는 계속 정신을 딴 데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닝타임이 조금 흐른 뒤에야 관객들은 원규의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그는 2년 전에 종로에서 일어났던 동성애자 남성 대상의 묻지마 폭행 사건의 희생자였던 거죠. 지금 그에게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심과 자신을 이렇게 방치한 이 나라에 대한 증오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원규가 망명자라면, 태준은 같은 아픔을 짊어지고 있어도 이 땅에서 버티고 살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그의 생각이나 태도는 원규보다 낙천적이지만, 그건 그가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두 사람의 만남은 나쁘지 않은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적어도 원규 혼자였다면 복수 활극과 진한 섹스가 들어간 멜로드라마가 버무려진 지금과 같은 모험담이 나오지는 않았겠지요.

기반은 멜로지만, 전 복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전 언제나 한국의 복수담이 복수자와 복수대상에 대해 어떤 이해도 없이 기계적인 폭력만 뿜어댈 뿐이라 심지어 복수의 카타르시스도 제대로 주지 못한다고 불평했잖습니까? [백야]는 그 함정을 적절하게 피해갑니다. 그건 적어도 복수자의 고통과 울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에서 복수는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짧은 폭력으로 끝날뿐이지만, 영화는 적어도 그 어설픈 복수가 주는 쾌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허무함으로 이어지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풀 패키지인 거죠.

서울 사대문 안이 무대이고 심지어 계절은 겨울이니, 제목이 무엇이건 영화는 백야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상징적인 제목이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우리가 이미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부한 재료로 이루어진 한밤중의 서울은 마치 꿈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그 밑에 숨겨진 세계를 보여줍니다. 백야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밤은 아닌 거죠. 그게 제목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12/11/14)

★★★

기타등등
전 요새 공중도덕을 안 지키는 캐릭터에 점점 민감해집니다. 원규가 화장실 문 옆에 씹던 껌을 붙였을 때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감독: 이송희일, 배우: 원태희, 이이경, 다른 제목: White Night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White_Night_-_2012.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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