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성영화제에서 가장 처음 본 영화는 상탈 아케르망의 [잔느 딜망]. 거의 이상적인 첫 영화죠. 이번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현기증]을 밀어내고 1등 먹은 영화인데, 페미니스트 여성 감독이 페미니스트 배우를 기용해서 만든 만든 여자 이야기. 70년대 영화지만 스태프의 여성 비중도 만만치 않게 높지요. 게다가 얼마 전에 쨍쨍한 디지털 복원판이 나왔습니다. 전 EP 녹화된 VHS 비디오로만 이 영화를 봤는데 말이죠.

1위를 먹은 영화치고는 좀 예외적이긴 합니다. 전에 1등이었던 [시민 케인], [현기증]과 같은 영화들은 영화로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느냐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작품이지요. 그 때까지 쌓아올린 영화만들기의 어법이 압축되어 있고 그게 후대에도 계승되었습니다. 이 두 편만 봐도 20세기 영화라는 장르를 대충 재현해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잔느 딜망]으로는 그게 어렵습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 만들기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요. 그러니까 '정상적인 영화'라는 것을 머리에 넣고 있어야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현기증]을 만든 히치콕은 '영화는 인생에서 지루한 것을 잘라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잔느 딜망]은 정반대로 갑니다. 히치콕이라면 잘라냈을 것 같은 지루한 인생의 조각들을 갖고 영화를 만든 거죠. 영화는 브뤼셀에 사는 잔느 딜망이라는 가정주부의 일상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쇼핑을 하고. 최대한 움직임을 줄인 카메라가 이런 잔느의 모습을 찍고 있지요. 이 영화 대사 절반 정도는 학교를 마치고 온 아들과의 대화가 차지합니다. 나머지 대화 상대는 주로 가게 직원이나 잔느의 '고객'들이죠. 잔느는 매매춘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전체 수익의 몇 퍼센트가 되는 지 모르겠지만요.

이런 묘사에는 당연히 정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루한 것을 잘라낸 것이 영화라고? 과연 영화감독들이 습관적으로 잘라내는 것들이 그렇게 무의미한가? 왜 그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잔느 딜망]은 그 당연하게 여겨지는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그리고 우리는 [잔느 딜망]을 보면서 당연한 듯 무시하고 잘라냈던 가사노동의 가치, 지루함, 반복을 검토합니다.

영화적으로도 이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우선 안 쓰는 근육을 쓰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에게 [잔느 딜망]은 델핀 세리그가 10분 동안 감자를 깎는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지루할 거 같은데, 의외로 이걸 구경하는 건 꽤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 세대 사람들은 이걸 더 재미있어 할 수도 있겠어요. [잔느 딜망]은 여러 모로 유튜브 일상 블로그와 닮았습니다. 좀 길긴 한데, 유튜브에서는 이것보다 더 나가는 동영상도 많죠.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조유리는 자기가 공부하는 걸 중계했습니다. 고정된 카메라가 앞에 있는 사람이 공부하고 딴짓하는 걸 4시간 43분 동안 보여주었어요. 요새 유튜브 컨텐츠는 형식만 따진다면 의외로 아방가르드합니다. 이 환경 속에서 [잔느 딜망]은 꽤 정상적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아주 느린)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단지 히치콕의 스릴러와는 방향이 정반대죠. 히치콕은 이야기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것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케르망은 얼핏보면 단조롭기 그지 없는 가정주부의 일상을 다음 날 한 번 더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직접 그 일상에 발생하는 균열을 관찰하고 추적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훨씬 주체적인 감상을 요구하는 작품입니다.

[잔느 딜망]의 사이트 앤 사운드 1위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10년 뒤엔 다른 영화가 1위로 올라가 사람들을 놀래키고 그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원래 리스트는 그런 재미가 있어야 하는 건데요. [시민 케인]의 장기 집권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23/09/04)

★★★★

기타등등
아케르망에게 잔느의 일상은 극도로 평범한 무언가였을 텐데, 거의 반 세기가 지난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겐 이미 과거가 된 외국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신기합니다. 특정 시공간을 저장하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긴 한데, 재미있는 것으로만 편집된 영화는 이 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요.


감독: Chantal Akerman, 배우: Delphine Seyrig, Jan Decorte, Henri Storck, Jacques Doniol-Valcroze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73198/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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