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박스 The Box (2009)

2012.04.12 21:53

DJUNA 조회 수:10246


[더 박스]의 원작인 리처드 매드슨의 [버튼, 버튼]은 반전이 있는 짧은 단편입니다. 어느 평범한 부부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찾아와 버튼이 있는 상자를 하나 내밀죠. 만약 이 버튼을 누르면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죽고, 버튼을 누른 사람은 5만 달러를 받게 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주인공들의 행동은 해피엔딩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매드슨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우아해서 장편과 잘 맞지 않습니다. 딱 이 정도 길이의 단편에만 어울리는 이야기죠. 실제로 이전에 나왔던 유일한 영상 각색물도 80년대에 나온 [트와일라잇 존] 에피소드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원작의 반전을 버리고 보다 은밀한 반전을 넣었는데, 매드슨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전 이게 더 좋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단편이고 내용과 주제도 같죠. 상금은 20만 달러로 올랐습니다만.

그런데 [도니 다코]의 감독 리처드 켈리는 왜 이 작품을 장편영화로 각색하려 한 걸까요? 그는 이 상자를 들고 다니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는군요. 왜 이런 일을 하고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밝히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답니다. 이해는 갑니다. 일종의 빈칸 채우기 놀이지요.

영화의 도입부는 [트와일라잇 존]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상자를 소개하고 부부는 고민하죠(돈은 이제 100만 달러입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영화는 원작의 이야기를 초반 몇십 분 안에 다 소화해버립니다. 그리고 끊김없이 계속 이야기가 이어져요. 그 때문에 텔레비전 에피소드의 결말은 완전히 낭비가 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그 뒤로 영화는 상자를 들고 다니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는 추리극이 됩니다. 그리고 그 추리극이 향하는 곳은 엉뚱하게도 SF입니다. 일종의 레트로 SF죠.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6년. 남편은 나사 직원. 알고 봤더니 상자를 들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남자도 실종된 나사 직원. 그리고 막 바이킹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했다죠. 그리고 주변에서는 딱 [도니 다코]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우리보다 엄청 높은 차원에 있는 외계 지성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귀가 잘 맞냐고요. 아닙니다. 매드슨이 만들어낸 상자의 딜레마는 당시에 유행했던 심리실험과 비슷해요. 비슷한 종류로는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 같은 게 있죠. 이들은 모두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허약하고 쉽게 흔들리는지 보여주려 한 것으로,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합니다. 매드슨은 여기에 교훈과 징벌을 추가했지만 그건 문학적인 재미를 위한 것일 뿐, 이들의 도덕성을 저울질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켈리의 영화에서는 이게 선인을 찾는 성서적 순례처럼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상자 문제는 지구를 방문한 초월적인 존재가 심각하게 내는 퀴즈치고 많이 얄팍하지 않습니까? 딱 구약성서 야훼 수준입니다. 먼 지구까지 찾아와서 그런 뻘짓을 왜 하냐고요.

그래도 영화는 여전히 [도니 다코]스러운 괴상한 재미를 갖고 있습니다. 상자의 미스터리는 치사하고 얄팍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이상하게 변해가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한 호러 효과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묘하게 불쾌한 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켈리의 아버지는 실제로 나사 직원이었고 어머니도 영화에 나온 것과 비슷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나름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에 이들 상당부분이 시시해져버리긴 하지만, 켈리의 [더 박스]에는 완벽하게 계산될 수 없는 시적인 면이 있습니다. 전 이들 상당 부분이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각색'은 아닙니다. 전 차라리 각본 과정 중 매드슨의 원작을 빼버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영화를 구성하는 상당 부분이 남았을 거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영화의 이야기와 논리에 더 맞는 다른 재료들을 찾았을지 모른다고요. (12/04/12) 

★★☆

기타등등
1. 프랭크 란젤라의 분장은 과연 필요했을까요? 으스스하긴 한데, 들이는 노력과 돈에 비해 효과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없어도 이야기 흐름엔 전혀 지장이 없었죠. 정 하고 싶었다면 훨씬 싸게 먹히는 일반 분장이 있고. 

2. 영화에서는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모두 여자입니다. 원작과 텔레비전 에피소드에서도 여자이긴 한데, 영화에 나오는 세 커플 모두 여자가 눌렀다면 의도를 의심할만 하죠. 뭐, 이브와 선악과, 판도라의 상자 따위를 의도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어쩌라고.

감독: Richard Kelly, 출연: Cameron Diaz, James Marsden, Frank Langella, James Rebhorn, Holmes Osborne, Sam Oz Stone, Gillian Jacobs, Celia Weston, Deborah Rush 

IMDb http://www.imdb.com/title/tt036247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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