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

2023.08.10 23:59

DJUNA 조회 수:3856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태화의 첫 메이저 장편 대작입니다. 그 전에 만든 [가려진 시간]은 강동원이 나오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소품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요새 신은수는 뭐하는지 모르겠네요.

원작이 있습니다. 김숭늉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인 [유쾌한 이웃]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1부도 지금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와 드라마가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닐 거 같아요.

재난물입니다. 단지 그 재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어마어마한 대지진 같은 것으로 서울시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는 오지 않고요.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안 온다면 이건 전세계적인 재난이라는 뜻일까요. 영화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설정의 수상쩍음을 그냥 건너뛰게 되지요.

이 재난에서 오직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았습니다. 애매한 중산층 사람들이 사는 황궁아파트라는 곳이에요. 아파트 사람들은 아파트 화재를 제압한 9층 주민을 리더로 뽑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외부인들을 쫓아내고 아파트를 요새로 만듭니다. 영화는 간호사와 공무원인 평범한 부부를 중심으로 이 아파트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려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최근 충무로 텐트폴 영화들이 연달아 빠진 실수를 피해갑니다. '내가 전에 본 할리우드 대작 영화와 비슷한 영화 만들기'를 안 해요. 물론 이런 식의 재난물은 선례가 너무 많아 다 건너뛸 수는 없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한국적 속성이 워낙 강하고 그것이 익숙한 장르 관습을 넘어섭니다. 그게 한국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고요.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역시 아파트에 대한 한국인의 기형적인 집착이지요. 생존 논리를 엄격하게 따지면 말이 안 될 수도 있는 일련의 행동은 이로서 모두 설명이 되고도 남습니다. 요새는 여러 부분에서 사회적 위험신호가 울리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적 행동들 역시 영화는 효과적으로 잡아내 장르의 틀 안에 넣고 무시무시하게 부풀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런 생존방식은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아파트는 그냥 어쩌다 잘 버틴 건물일 뿐. 생산수단 같은 건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약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언제까지 갈까요? 무엇보다 그 아파트가 계속 버틸 수 있을까요?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충 뽑은 지도자 때문에 파시즘의 징후를 보이고, 심지어 아파트의 부실 공사가 이슈가 된 시기에 개봉하니까요. 그렇다고 영화가 꼭 한국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전 보면서 100년전 독일 생각을 했어요. 순혈주의를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은 출신성분이 수상쩍은 파시즘 지도자라니, 이 영화의 주민대표는 여러 모로 히틀러스럽습니다.

여러 모로 잘 만든 작품이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도 올해 제 연말결산에 올라갈 거의 유일한 충무로 메이저 영화가 될 거 같은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영화가 선과 악을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전 이게 매우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오로지 한국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 아닙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선과 악을 양극에 둔 긴 회색의 스펙트럼 안에 위치합니다. 주민대표 영탁은 악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겠지요. 간호사 명화는 선에 가깝고요. 명화의 공무원 남편 민성은 그 가운데 쯤에 있습니다. 집단의 분위기에 생각없이 휩쓸리다 결국 집단의 일부로서 파국을 초래하는 인물이지요. 영화는 민성은 일반적인 대한민국 대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명화를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토리 논리만 보면 명화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박보영이 연기하고 있어서 캐스팅만으로도 명화의 올바름과 선함이 이해가 되지요. 하지만 온갖 디테일을 넣고 행동과 동기를 설명하고 있는 영탁 캐릭터와 비교해 보면 명화의 선함은 평면적입니다. 조금 더 악담을 하자면 명화는 관습적인 '착한 여자'입니다. 어차피 파국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니 선한 쪽의 힘이 약한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데 명화가 영화의 주제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그래도 조금 더 힘이 들어가야죠. 적어도 민성보다는 더 큰 비중으로 그려지고 더 입체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없지 않을 겁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선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다.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 재미있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신경 쓰이는 건,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가 비판하는 모든 것들을 영탁에 동조하면서 거꾸로 이해하는 관객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사람들이 극장 밖에만 있겠습니까? 영화가 뭐라건, 아마 그들은 목소리가 큰 중년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생각없이 영탁을 따라갈 것입니다. (23/08/11)

★★★☆

기타등등
1. 엄태구가 카메오로 나옵니다.

2. 부녀회장 금애로 나오는 김선영의 전작 [드림팰리스]를 먼저 보고 보시길 추천합니다. 두 작품 모두 아파트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룬 한국적 비극이지요.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황궁아파트 옆에 있다가 붕괴된 아파트 이름이 드림팰리스예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먼저 찍은 영화이긴 합니다.


감독: 엄태화, 배우: 박보영, 박서준,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이병헌, 다른 제목: Concrete Utopia

IMDb https://www.imdb.com/title/tt13086266/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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