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 (2020)

2020.06.19 22:08

DJUNA 조회 수:5200


[사라진 시간]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인 수혁과 아내 이영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시작해요. 이들은 평화롭고 행복해보이는데, 뭔가 비밀이 있습니다. 10여분이 지나면 그 비밀이 밝혀집니다. 이영의 몸엔 밤마다 귀신이 들어오네요. 관객들은 수혁의 엄마, 이주일, 역도산이 들어오는 것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주민은 두려워하면서 그 집 안에 철문을 설치해 밤마다 이영을 가두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수혁과 이영이 갇혀 있는 동안 화재가 일어나 두 사람이 죽어요. 영화가 시작되고 20여분 뒤의 일입니다.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형구라는 형사가 옵니다. 위의 설명을 읽어도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니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수상쩍지요. 그런데 마을 생일 잔치에서 술을 마신 형구에게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깨어나보니 자기는 불타지 않은 교사의 집에 있고 사람들이 자길 다 교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었던 형사의 존재는 흔적도 찾을 수 없어요. 이건 꿈일까요? 아니면 실수로 원래 살던 세계와 비슷한 평행우주에 갇혀버린 걸까요?

영화는 이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기대하고 봐도 4분의 3 지점에서부터는 포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 이상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해명할 생각은 없는 영화입니다. 이 어처구니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고 감상할 수밖에 없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다들 좋아하잖아요. [사라진 시간]도 그렇게 감상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근데 그게 안 됩니다. 전 대충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우선 재료들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아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아름답거나 재미있거나 이상하거나 오싹하거나 그 네 개 모두인 캐릭터들 주변에서 아름답고 이상하고 불쾌한 슬픈 이야기가 일어나는 영화지요. 계속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진 시간]에서 관객들은 진짜로 재미없는 시골 마을에 사는 정말로 관심 안 가는 사람들 사이에 갇히게 됩니다. 아무리 환상적인 설정을 넣는다고 해도 재료가 이렇게 재미없으면 심심할 수밖에 없죠. 이런 지루한 마을은 [사랑의 블랙홀]처럼 주인공이 이 세계의 설정을 이용할 수 있는 경우엔 재미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요.

이 재료들이 이야기 속에 재미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꾼의 시야가 좁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시간]은 철저하게 한국 중장년 남자의 시선 안에 갇혀 있는 영화예요. 이건 장르가 이런 종류의 판타지일 때 더 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세계 전체를 이루는 재료가 그 사람 안에서 나오니까요. 그 좁은 시야는 타자이거나 대상화된 존재의 묘사에서 한계가 두드러지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자들이지요. 역시 중장년 배우의 첫 감독작인 김윤석의 [미성년]과 비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김윤석은 수상쩍고 어이 없는 이야기를 진행시켜도 공동창작자와 함께 자기 경험 바깥으로 나가서 생생하고 주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데, [사라진 시간]의 여자들은 비슷비슷한 말투부터가 중장년 남자의 얄팍한 창작이라는 티가 나요. 무엇보다 중견배우 출신의 감독/작가의 대사 귀가 이렇게 예민하지 못하다는 게 실망스럽지요. 그렇다면 남자들은 재미있는가? 아뇨. 영화는 이들에게 입체성과 깊이를 부여할 수 있는 냉정함이 없는 걸요. 형구는 그냥 매력없는 남자예요.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고 무례하고 화만 엄청 잘 내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재료들은 잘 붙어 있지 못하고 덜컹거려요. 초현실적인 내용의 영화에서 이야기가 현실적인 논리에 의해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플로우는 있어야 하고, 행동은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요. 예를 학교 선생 아내의 몸에 역도산이나 이주일의 귀신이 들어온다는 게 과연 그 사람을 굳이 철문 안에 가두어야 할 이유가 되는가? 영화 속 세계도 마찬가지지요. 형사가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의 희생자가 되어 깨어나는 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깨어나보니 불타지 않은 희생자의 집인데 자신은 그 집에 사는 학교 교사인 거 같은데 이름은 형사 때와 같고 죽은 교사와는 달리 독신이고... 이런 식으로 풀어가다보면 모든 게 지나치게 잡다해져버립니다. 이야기꾼이 임의로 덕지덕지 설정을 붙여가며 만든 이야기예요. 흐르질 못하죠.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면, 대부분 각자의 실력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니까. 시치미 뚝 떼고 이주일 흉내를 내는 차수연의 모습엔 분명 어처구니 없는 재미가 있어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개인기죠. 이 영화는 배우들이 자기 진가를 보여줄만한 재료가 없어요. (20/06/19)

★★

기타등등
화면비는 비스타예요.


감독: 정진영, 배우: 조진웅, 배수빈, 차수연, 정해균, 이선빈, 신동미, 장원영, 신강균, 강민 다른 제목: Me and Me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9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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