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2008)

2010.03.01 19:30

DJUNA 조회 수:9038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그의 어처구니없는 모험담을 읽은 뒤로, 필립 프티는 제 마음 속의 영웅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그의 이름을 잊은 적 없고, 뉴스를 통해 세계무역센터 빌딩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동안에도 잠시 그를 생각했습니다. 그의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졌던 걸까요. 아마 그의 모험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명백백하게 논리적이었기 때문이겠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두 개에 줄을 턱 하니 걸쳐놓고 그 위를 걷는다는 것은 곡예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 무익하지만 절대적인 목표를 위해 그가 바친 세월과 노력과 간계를 생각하면 전 아직도 흥분하게 됩니다. 

얼마 전 [위스콘신 데스 트립]의 제임스 마쉬가 필립 프티의 다큐멘터리를 내서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영화 [맨 온 와이어]죠. 프티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너무 늦게 만들어진 것 같긴 하지만, 9/11이 없었다면 아예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영화이긴 했습니다. 9/11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영화지만, 관객들은 이 작품을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테러로 사라져 버린 건물들에 대한 애가로 읽을 수밖에 없지요. 

프티의 이야기를 순수한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시각적인 이벤트이지만 영상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위스콘신 데스 트립]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현 드라마를 인터뷰 중간 중간에 삽입했습니다. 그가 대역으로 고른 배우들(특히 젊은 필립 프티 역의 폴 맥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모델들과 닮았는데, 오히려 전 이 때문에 가끔 몰입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젊은 프티가 진짜인지 배우인지 종종 헛갈렸기 때문이지요. 

마쉬는 이 영화를 범죄 스릴러처럼 다루었습니다. 필립 프티와 그 일당들이 세계 무역 센터에 진입하기 위해 꾸민 음모는 건물의 금지된 영역에 불법 침입한다는 점에서 은행털이와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단 남의 돈을 터는 대신 세기의 곡예를 펼칠 생각이었다는 점만이 달랐죠. 그 때문에 관객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프티 일당의 음모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쉬가 재현 드라마를 잘 찍긴 했지만, 이 영화의 서스펜스 상당부분은 인터뷰에서 나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프티와 그 일당들은 아직도 당시의 흥분을 잊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 억양이 섞인 유쾌한 영어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프티는요. 그가 당시의 상황을 온 몸을 던져 재현하는 걸 보면 절로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인터뷰 대상의 감정과 흥분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우들의 역할이 제한될 수 없는 재현 드라마의 긴장감도 같이 높아집니다. 

드디어 곡예가 시작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재현 드라마는 사라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영상자료들과 인터뷰만 남죠. 마찬가지로 서스펜스 역시 그와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한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목숨을 건 곡예를 펼치고 있지만 더 이상 공포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남은 건 거의 찬란하기까지 한 해방감뿐이죠. 

러닝타임 내내 필립 프티 일당들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영화이지만, [맨 온 와이어]의 어조는 제가 읽었던 [리더스 다이제스트] 요약 기사보다 조금 더 냉정한 편입니다. 일단 영화는 그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걸 거리낌 없이 밝히고 가끔 노골적으로 놀려대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인터뷰 대상을 떡 하니 앞에 데려다 놓고 말이죠. 영화는 음모 성공 이후 소원해진 일당의 관계에 대해서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정보들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정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업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쓰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글과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과거를 반추하는 다큐멘터리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마 그 역시 영화의 중요한 주제겠지요. 우린 모두 찬란한 순간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 순간은 결국 가기 마련이고 우린 그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10/01/26)

 

★★★☆

기타등등

시사회에서 본 영화 자막은 별로더군요. 특히 번역자가 프랑스어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티가 너무 역력해서 민망했습니다. 이걸 그대로 걸면 좀 창피할 텐데요.

 

감독: James Marsh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