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백만년 One Million Years B.C. (1966)

2023.09.12 23:57

DJUNA 조회 수:1489


[공룡 백만년]을 보았습니다. 1940년에 나온 빅터 마추어 주연의 [One Million B.C.]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지요. 리메이크의 원제는 [One Million Years B.C.]. 중간에 'Years'가 붙었습니다. 원작 영화는 외젠 로쉬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식 각색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영화의 크레딧엔 원작 언급이 없어요. 모두 모두 상업적 성공작이었는데, 지금은 리메이크작이 더 유명합니다. 이유가 둘 있어요. 레이 해리하우젠 그리고 (가죽 비키니를 입은) 라쿠엘 웰치.

맞는 게 하나도 없는 영화로 유명합니다. 일단 기원전 백만년이라는 시기부터 말이 안 되지요. 이 때는 백인은 커녕 현생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룡도 없었지요. 전 어떻게든 이 이야기에 논리를 부여하려 노력해 봤습니다. 이건 소수의 공룡이 살아남았던 '잃어버린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이 영화 속 백인들은 인류가 존재하기 훨씬 전에 존재했다 멸종한 근연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굳이 이 영화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인간과 공룡을 한 화면에 넣기 위한 여러 억지 핑계 중 하나입니다. 어떤 작품은 타임머신을 썼고 어떤 작품은 유전자 공학을 썼는데, 이 영화는 그냥 원시인과 공룡의 공존을 택했던 거죠.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단순할 수밖에 없어요. 이 영화 속 원시인들은 영어를 안 쓰거든요. 자막도 없고요. 그러니까 도입부의 내래이션을 제외하면 무성영화나 다름 없어요. 로아나나 투막과 같은 주인공들의 이름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영화는 바위 종족이라는 원시인 부족으로 출발합니다. 화산 근처의 황량한 산악지대에 사는 백인 야만인들이에요. 존 리처드슨이 연기하는 투막이라는 이름의 남자주인공은 어쩌다 보니 무리에서 벗어나 털복숭이 야만족 (네안데르탈인일까요)들과 공룡, 거대한 도마뱀들을 거쳐 해안에 도달하는데, 거기엔 금발머리의 조개껍질 부족이 살고 있었던 거죠. 그들은 바위 종족보다 문명인입니다. 도구도 더 좋은 걸 쓰고 옷도 더 세련된 것을 입었죠. 무엇보다 이들은 금발로 염색한 라쿠엘 웰치를 갖고 있습니다. 웰치의 헤메코는 이들이 문명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예요. 하여간 투막은 웰치의 캐릭터 로아나와 사랑에 빠지고 같이 바위 부족이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요.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 설정이 여러 모로 린다 카터 주연 [원더우먼]의 파일럿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조개껍질 부족 사람들이 여자밖에 안 나와서 더욱 그랬죠. 나중에 남자들도 나오지만.

영화의 원시인 묘사는 두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의 인종적, 성적 편견을 반영합니다. 이 사람들이 '과거의 야만'이라고 생각하고 넣었던 것이 사실은 현대 백인 남성의 편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영화는 그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원시인이 공룡과 같이 나오는 영화에서 고고학적 사실성을 따지면 아무래도 웃기기 마련입니다.

영화에는 많은 괴물 장면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화면합성으로 만들어낸 거대 도마뱀이에요. 이 도마뱀은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 캐스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냥 원작을 따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스토리가 크게 바뀐 작품은 아니에요. 공룡은 25분 이후부터 나오는데, 이 뒤에 나오는 공룡, 익룡, 거대 바다거북들은 모두 레이 해리하우젠의 걸작입니다. 말이 되는 장면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장관인 건 바뀌지 않죠. 알로사우르스 장면만 봐도 원작의 어마어마한 업그레이드인 게 보입니다. 원작에서는 공룡 옷을 입은 스턴트 더블이 알로사우르스 역할을 했는데... 원작은 퍼블릭 도메인이니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이나 주제 같은 것으로 기억되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의 인상 대부분은 가죽 비키니를 입은 라쿠엘 웰치와 스톱 모션 괴물들의 존재가 만들어내고 있고 나머지는 큰 관심이 안 갑니다. 솔직히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긴 바위 종족 털복숭이 남자들을 굳이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영화가 기억되기 위해 모든 게 다 좋을 필요는 없습니다. (23/09/12)

★★★

기타등등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가 비슷한 설정이죠. 역시 프랑스어권 소설이 원작이고 원시인이 나오는 영화인데. 단지 공룡이 안 나오고 빙하기가 배경이며 야만적인 백인 원시인에게 문명을 전파하는 사람이 흑인 여성입니다.


감독: Don Chaffey, 배우: Raquel Welch, John Richardson, Percy Herbert, Robert Brown, Martine Beswick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60782/
Daum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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