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좀 전에 쥬느비에브를 봤습니다. 비디오를 예약해 두었다가 잊고 있었는데 찾아가라고 도서관에서 편지가 왔더군요.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화던지. 보고 나서 듀나님 리뷰도 방금 읽었어요. 굉장히 영국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소동이 정말 유쾌하더군요. 그리고 주인공 매킴부부가 주고받는 대화는 어쩌면 그렇게 살아있던지, 진짜 커플이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같은 밀고 당기는 관계를 관찰력 있게 잘도 잡아냈더군요. 비록 남녀관계는 50년대답게 꽤나 구식이지만, 인물이 살아있다보니 이 영화의 미시적인 관계에선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속에 남자들이 터프하게 폼잡는 게 아니라, 구식 자동차를 갖고 경쟁하는 14살짜리 소년같이 구는 다 큰 남자들과, 이해심 많고 상식적이면서도 사려깊은 여자들이 등장하죠. 등장인물들을 경박하게 스테레오 타입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군더더기 하나없이 재미있고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데도 있으니, 시나리오를 정말 잘 썼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2년 전인가 런던-브라이튼 빈티지카 경주가 있을 때 브라이튼에서 이 경주를 직접 보았답니다.



1900년대에 만들어진 박물관에 있어야할 차에 한 80은 족히 되었을듯한 커플이 구식 고글을 쓰고 은색 머리를 휘날리며 브라이튼 피어로 진입하는 걸 비롯해서 정말 온갖가지 고물, 아니 빈티지 차들이 벌이는 퍼레이드를 봤거든요. 아마 웬디와 알란 매킴이 아직 살아있으면 그 멋진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근사하게 구식으로 차려입고 참가하고 있겠죠. 온갖가지 오래된 차들이 브라이튼 해변가로 들어서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서서 봤습니다. 50년전에도 털털거리던 차들이 21세기초에도 여전히 굴러가고 경주를 하는 모습이라니...

하이드 파크에서 시작해서 버킹엄 궁전을 뒤로 하고 달리는 그 길도 몇 번 차로 가봐서 눈에 익은데다 브라이튼 피어와 해변가도 기억이 생생해서 영화보면서 내내 혼자 '세상에,  차가 거의 없는 거 빼고 5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어머 메트로폴 호텔도 그냥 그대로네'하면서 신이 나서 봤답니다. 물론 브라이튼 가는 길은 지금보다 훨씬 시골스럽고 정답지만 말이죠. 그래도 시골 펍이나 오두막은 그대로인데도 많습니다.

제 친구의 어머니가 전쟁 말기에 태어나 50년대에 10대를 맞이해서 그런지, 50년대를 굉장히 희망에 찬 시대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전후의 빠듯한 배급과 어려운 시절을 지나서 모든게 막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앞으론 평화롭고 좋은 시절만 있으리란 희망이 있던 시절로 말이에요. 나니아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온 셈이죠. 영화를 보면서 화사한 50년대풍 옷을 입고 댄스파티에 다니던 10대 소녀적 사진을 저한테 보여주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던 귀여운 아주머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쥬느비에브에도 그런 낙관과 따스함이 가득합니다. 비오고 춥고 구질구질한 겨울 날씨에 정말 잠시 즐거웠어요. 추천해주신 듀나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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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애들 틈에 껴서 'Lemony Snicket's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를 봤습니다. 현재 11권까지 나온 같은 제목의 소설 시리즈 중의 처음 3권을 묶어서 영화 한 편으로 만들었더군요.

어둡고 고딕스런, 약간 로알드 달과 팀 버튼을 연상하게 하는데가 있는 꽤 잘 만든 영화였지만 뭔가 좀 밍밍한데가 있었어요.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의상도 침침하면서 근사하고, 빌리 코놀리에 심지어 메릴 스트립까지 등장한 캐스팅도 화려하며 아역들도 연기를 비교적 잘했지만 ,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감정이 결여된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중간중간 약간 지루하기까지 했거든요. 아마 제가 짐 캐리의 오바 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인가봅니다. 이 사람이 연기하는 카운트 올라프가 이 영화에서 제일 재밌는 인물이어야 하거든요. 흥미롭고 거창한 악당이 등장하면 갑자기 영화에 활력이 돌고 재밌어야 하는데, 짐 캐리가 뭘하든 '마스크'의 정서불안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요. 차라리 마이클 키튼의 비틀쥬스 캐릭터로 바꿔치길 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도 했는걸요. 짐 캐리가 좀 덜 짐 캐리스럽게 오바하고, 영화가 아예 더 사악하고 기괴했으면 좋았을 뻔했단 생각이듭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신나게 반응하더군요. 몰입해서 보다가 어떤 장면에선 박수도 치면서 말이죠. 특히 어른들이 애들이 중요한 말을 하는데도 전혀 안 들어줄 때 관객 중에 어떤 아이가 '멍청이'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들 웃었답니다. 그정도면 영화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재밌더군요.

보더스 서점에서 아동용 책을 3권을 2개 값에 주는 할인을 하길래 이 시리즈 4,5,6 권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그냥 집에 왔습니다. 주말 아침마다 서점에 가서 커피마시면서 한 권씩 그냥 읽을랍니다.


*바이올렛은 근데 완전히 고딕 소녀 맥가이버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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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블로워 시리즈를 티비에서 종종 재방송을 해주어서 대부분 봤지만 프랑스 혁명 혹은 반혁명에 명분없이 휘말리는 'The Frogs and the Lobsters' 편을 놓쳤었죠. 쥬느비에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갔을 때 눈에 띈 김에 얼른 같이 집어가지고 왔습니다. 쥬느비에브를 즐거운 토요일 밤 영화로 미루어 놓고 어제 밤에 혼블로워부터 봤습니다. 제목에 나온 개구리는 프랑스군, 가재는 빨간 제복을 입은 영국군인 모양이에요.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자기 영지에 돌아가자 마자 마을에 기요틴을 세워놓고 학살을 서슴치않던 프랑스 귀족과 냉랭하고 독설을 잘 하지만 덜 폭압적이고 온건한 영국귀족을 대비시키면서 우리의 양심적인 사나이, 진짜 '신사'이려고 애쓰는 혼블로워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영국인의 편견도 있겠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단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니까 영국이 아직 공화국이 못되었고, 귀족들이 아무리 쇠퇴했어도 아직도 일부는 타이틀과 영지와 의회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죠..

영국귀족 에드링턴 백작역의 새뮤얼 웨스트는 사실 공공연한 사회주의자이고, 지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속물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꽤 자주 재수없고 얌체같고 못된 영국 귀족 혹은 상류층 역을 맡게 되는 것 같더군요. 이 사람의 아버지 티모시 웨스트는 이름난 셰익스피어 배우인데, 넓고 다부진 체격에 대머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죠. 새뮤얼 웨스트는 배우로선 아버지만 확실히 못하지만 요즘은 연출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나이들더니 외모가 점점 아버지와 판박이의 길로 가고 있더군요. 쯧쯧.


맨 나중에 호레이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물론 현지에서 눈이 맞은 프랑스 아가씨한테 생긴 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거기서 뭘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우린 파괴와 죽음만 가져다 주었는데'라고 하는 장면에서 요즘 이라크에 가 있는 영국군 생각이 나더군요. 아무리 단순한 사람이라도 명분없는 전쟁에 파견된 직업군인의 심정은 어느 시대나 보편적이겠죠. 고지식한 주인공한테 어찌나 감정이입을 했던지 얘가 우니까 보던 제가 다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맘에 들게 생긴 주인공이 매우 귀엽게 군 탓도 있지만 말입니다.

혼블로워역의 요안 그리피스는 검은 고수머리에 검은 편인 피부, 짙은 색 눈동자를 가진 웨일즈사람이잖아요. 교육도 집에서 썼던 언어도 웰쉬랍니다. 필요하면 어떤 액센트도 잘 소화하는 편이지만, 인터뷰할 때는 웨일즈 억양이 좀 묻어나죠. Ioan Gruffudd라고 표기하는 이름 때문에 토크쇼 나올 때마다 이름이 화제가 되죠. 하도 발음과 스펠링을 영어식으로 바꾸란 소릴 많이 하니까 제가 본 인터뷰에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외국어도 하는데 그냥 노력 좀 하라'고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이사람은 헐리우드로 가서 비교적 잘 나가고 있는 편인 모양인데, 지금 제시카 알바와 함께 'The Fantastic Four'를 찍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극에 많이 나오더니 이젠 스판덱스 입은 미국 만화 영웅을 하려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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