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회한 책
어릴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샀고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잘 못봅니다.
늘 잡힐듯말듯한 마음 안주는 연인같지 않나요?
수입의 10%는 무조건 책과 음반을 사자 하는 마음으로 생활한 적도 있어 방하나가 몽땅 책이었던 적도 있습니다만
나이들수록 사놓고 안보는 경우가 생기고 모처럼 여유가 생겨 막상 읽다가 잠이 쏟아지는 경우도 겪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가 컸던 책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토지전권
읽긴 다 읽었는데 귀국하는 대목부터 참을 수 없이 지루했어요.
지금 읽어보면 느낌이 다를지 모르겠지만 길상이나 봉순이..하다못해 일본첩자하는 그 선생출신 같은 이도 매직아이처럼 또렸이 떠오르는데
주인공 서희는 내내 불투명하고 속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공의 성품이 본래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작자도 이 명문가 미모의 상속녀를 그냥 예쁘고 당찬..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외려 아주 옛날 최수지의 갈매기같은 눈썹을 보면서 저 여배우의 외모가 소설의 서술보다 더 개연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니까요.
한국사람으로서 일제시대상을 어느 정도 구현한 초장편소설을 갖고 싶다는 욕심에 구입했는데 학생시절 한권한권 읽던 재미가 더 좋았습니다.
불경된 생각입니다만 소설 후반으로 넘어가서는 정리되지 않는 에피소드를 계속 던져넣는다는 느낌마져 들었고 마무리도 별로였어요.
둘째 김승옥 전집
아주 어렸을때 집에 '내가 훔친 여름'이라는 장편소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보관했다면 중고책자체로도 가치가 있었을텐데 독립하면서 없어졌어요. 김승옥이 직접 그린 삽화가 있고 작가의 청년시절 사진이 있던데 그의 소설책에 왜 고등학생시절의 사진이 있는지 한동안 의문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아이돌같은 작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은 나이들고 병까지 있어 많이 변했지만 젊은시절 정말 잘생겼어요. 그 소설자체는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런데 재기넘치는 문체를 보면 호감이 안갈 수가 없어요.
무진기행도, 60년대식도, 1964년 겨울도 훌륭합니다만 그의 진면목을 보려면 꽁트들을 봐야합니다. 하나같이 정교하고 잘 썼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소재들이 죄다 여자, 가난, 뻔뻔함, 이기심, 소시민같은 거여서 어머니께 권했다가 된통 무안을 당했습니다.
소설집 중 빛나는 그의 대표작들, 주로 화장품잡지에 썼다는 掌篇을 빼면 본격적 대중소설이 나오는데 도대체 뭐가 작가로 하여금 이런걸 쓰게 했는지 궁금해질지경입니다.
강변부인을 읽다가 그냥 덮어버렸고 상자에 싸서 제일 높은 곳에 올려버렸어요.
세번째 온갖 실용서들. 창피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많습니다.
가수 휘성이 어디선가 실용서를 80권을 읽었다는 말에 심기일전했던 영향도 있습니다.
그 무엇이 절 그렇게 변화시키고 단련시키고 달리 마음먹게 하려고 애썼는지 모르겠어요.
성공을 꿈꾼 적도 없고 돈에 열망하지도 않았단 말이죠.
그저 조금 행복하고 도태되지만 않기를 바랬는데 그렇게 공부하고 신경써야 한다니..
마음의 위로가 되었던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의지대로 안되는 것도 분명 있다는 거였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신할 수 없는 것에 절망절망하던 나날을 겪고 행복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기위해 행복을 바랬다는 구절에
깊이 동감하며 온갖 성공서들을 놓아버렸는데 정말 불쏘시개를 하고 싶어요.
어쨌든 피같은 돈으로 산 책들인데 책장가득한 걸 보니 답답합니다.
좀 정리해야겠네요.
중고처분을..../내가 번역한 책은 다 가지고 있어야지 했지만 겨우 이 정도 경력에 10권 정도는 그냥 버리고 싶군요
책장에 본인이 작업한 책 있으면 진짜 뿌듯할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금서를 없애버리지 못하는 호르헤영감같은 타입이라서요.
알라딘에 사업자등록을 해볼까요?
저도 필요 없는 책들 알라딘 중고매장에 올려놓고 있거든요.
딱히 급하게 팔아야 하는 거 아니시라면 처분하기엔 가장 경제적이네요.
주문 들어 올 때마다 한권씩 택배 보는게 귀찮긴 하지만요.
안 읽고 내놓은 책들이 팔리면 후딱 읽어보게 되는건 부수적인 장점이에요.
바쁘게 살아서 그게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3은 실용서가 아니라 자기계발서 말씀 아니신지...?
자기계발서도 있고 국내철학자가 여러책도 있어요. 성공지침서, 인간관계론, 공부하는 법, 명사들의 자기고백, 일본, 미국, 독일, 영국작가들 등등등
김승옥 전집 저에게 버리세요! 라고 말씀 드리려 했는데 없어졌군요(...)
그래도 제 학생시절을 온통 뒤흔든 작가에요. 보통여자, 강변부인이 아무리 기막혀도 무진기행과 싸게사들이기, 서울1964년겨울의 우리나라 대표소설가인걸요.
김승옥과 이청준이 없는 우리나라 60년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애증으로 갖고 있으렵니다. 천장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