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크리스 와이즈 Chris Weitz
폴 와이즈 Paul Weitz

주연
휴 그랜트....윌
Hugh Grant....Will
니콜라스 홀트....마커스
Nicholas Hoult....Marcus
토니 콜레트....피오나
Toni Collette....Fiona
레이첼 바이스....레이첼
Rachel Weisz....Rachel
샤론 스몰....크리스틴
Sharon Small....Christine
빅토리아 스머핏....수지
Victoria Smurfit....Suzie
어거스터스 프루....알리
Augustus Prew....Ali

마커스와 윌

휴 그랜트는 기본적으로 얄팍하고 공허한 배우입니다. 그건 그의 한계인 동시에 지금까지 그의 경력을 지탱해온 매력의 근원이기도 하죠.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나 [노팅 힐] 같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그가 적역이었던 것도,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얄팍해서 그가 연기한 '로맨틱한' 캐릭터들이 오염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페이퍼백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텅빈 남자 주인공들의 실사 영화 버전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바웃 어 보이]는 휴 그랜트의 경력 중 가장 아이러니컬한 작품입니다. 휴 그랜트가 이 영화에서 연기한 런던 백수 윌 프리먼은 그가 지금까지 연기한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얄팍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휴 그랜트의 연기는 그 어떤 때보다도 더 강한 실체감을 부여받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완벽하게 이치가 맞습니다. 그랜트의 성공적인 연기 대부분은 그의 얄팍함과 공허함을 지반으로 삼아, 그 위에 로맨티시즘과 같은 장식을 쌓아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랜트는 이 영화에서 얄팍함 자체를 연기했습니다. 가식이 전혀 없는 연기였고 아마도 자연인 배우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영역이었겠죠. 그러다보니 그의 연기는 정말로 진실해졌습니다. 배우 휴 그랜트가 가지고 있던 기본 매력을 망치지 않으면서도요.

휴 그랜트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윌 프리먼이라는 캐릭터를 발명해낸 원작자 닉 혼비의 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캐릭터의 승리입니다. 닉 혼비는 아무래도 이런 식의 백수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모양입니다. 윌 프리먼은 [하이 피델리티]의 롭 고든보다는 단순한 인물이지만, 그만큼은 재미있는 남자입니다. 이 남자의 유치찬란한 이기주의와 겉멋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도 엉뚱할 정도로 결백한 매력을 부여하는 수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킬킬 웃음이 나옵니다.

영화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고 진부합니다. 공장생산된 기성품 플롯이라고 해도 좋아요. 영화는 직업도 없이 부모 유산으로 살아가는 어느 덜 떨어지고 이기적인 남자가 한 소년을 만나게 되면서 책임감있는 성인 비슷한 존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화는 성장물입니다. 여기서 성장하는 주인공이 30대 후반의 남자라는 게 다를 뿐이죠. 하지만 영화의 포스터 카피가 말한 것처럼 성장은 꼭 나이랑 상관 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스토리의 진부함은 여기서 큰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몰리에르가 자기도 쓰면서 지쳤을 달아나는 연인 이야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면서도 계속 걸작을 써냈던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건 캐릭터이고 스토리는 캐릭터를 유지시켜주는 기둥에 불과합니다. '군집 동물의 본능에 충실하라'라는 주제는 조금 더 중요하지만 역시 작가나 감독이 이 소박한 주제를 필요 이상으로 과장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적인 설정에 시달리며 좌충우돌하는 주인공 윌입니다. 우린 그가 '성장'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그 결론이 아니라 그 과정이지요. 우리가 그 과정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스토리의 익숙함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굉장히 강한 영국식 유머로 가득 찬 이 영화를 [아메리칸 파이]의 와이즈 형제가 만들었다는 사실은 조금 당혹스럽습니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그들이 혼비의 소설이 가진 강한 영국색을 제대로 살린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 할리우드화시킨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요. 그러나 이 정도면 아주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원작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겠지만, 와이즈 형제의, 신중하면서도 때때로 정곡을 찌르는 연출은 그들이 화장실 유머 전문가 이상이라는 걸 증명해줍니다.

훌륭하게 캐스팅된 배우들 역시 언급되어야 합니다. 휴 그랜트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고... 마커스 역의 니콜라스 홀트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쓸데없이 귀여움을 강조하지 않는 연기 역시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홀트와 그랜트는 죽도 굉장히 잘 맞습니다. 이들이 퀴즈 쇼를 보면서 건성으로 꿍시렁거리는 대사들만 들어도 알 수 있지요. 이들보다는 다소 뒤에 물러나 있지만, 레이첼 바이스와 토니 콜레트의 노련한 호연 역시 언급해야 할 듯 합니다.

[어바웃 어 보이]는 무척 즐거운 영화입니다. 적어도 최근들어 극장에서 본 영화들 중 이만큼 노골적이면서 확실한 즐거움을 제공한 영화는 없었던 것 같군요. 잘 짜여진 휴먼 드라마가 얼마나 효과적인 오락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좋은 예입니다. (02/08/30)

DJUNA

기타등등

1. 원래는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가 윌 프리먼 역으로 고려되었다는군요. 피트는 말도 안되고, 클루니의 느글느글한 매력이 윌과 연결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역시 윌 역의 배우는 영국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랜트는 이상적인 선택이었어요.

2. 중간에 윌이 열심히 타이프를 치며 들어가려고 했던 인터넷 사이트는 바로 여기입니다. 얼마나 실망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