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아 풀 Léa Pool

주연
알반느 길르....안느
Albane Guilhe....Anne
루이즈 말로....알릭스
Louise Marleau....Alix
루시 로리에....사라
Lucie Laurier....Sarah
기 토베트...토마
Guy Thauvette....Thomas
위그 케스테....피에르
Hugues Quester....Pierre
누비트 오즈도그루....시몽
Nüvit Özdogru....Simon
킴 야로셰프스카야....어머니
Kim Yaroshevskaya....La mère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안느 트리스테

듀나 제가 [안느 트리스테]를 처음 본 건 88년이었어요. 당시 88 올림픽 행사 중 하나로 참가국에서 온 영화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했었는데, 이 영화는 '캐나다 대표'였던 거죠. 물론 굉장히 잘린 버전이었지만요.

파프리카 전 그 다음 해에 재방송한 걸 봤던 것 같은데요. EBS 일요일 오후 시간대 영화로요. 아니 그 때는 KBS-3이었나? 안느와 알릭스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와, 요새는 저런 게 텔레비전에 나와도 되는구나..."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듀나 더빙 번역에서는 알릭스가 언니로 둔갑했었죠?

파프리카 맞아요. 그 때문에 이야기가 상당히 근친상간적으로 변했었잖아요! 레아 풀의 영화에는 그것도 어울리는 것 같지만요.

듀나 [안느 트리스테]는 제 '추억의 영화' 중 하나죠. 당시 이 영화에 대한 제 반응은 정말 유치한 감상으로 가득 차 있었답니다. 영화에 나왔던 다니엘르 메시아의 노래 가사를 받아 적고, 노트에다 끝도 없이 떠다니는 의자들을 그리고요. 하긴 그땐 저도 '십대'였으니까. 젠장. 하여간 이 영화에는 뭔가 절 푹 찌르는 구석이 있었어요. 찔린 부위가 심장이었는지, 다른 어느 부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파프리카 줄거리를 요약해 볼까요. 주인공 안느 트리스테는 스위스인 미술학도입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안느는 남자친구 피에르와 어머니를 스위스에 남겨두고 몬트리올로 떠나지요. 몬트리올에서 안느는 아버지의 친구인 시몽과 아마도 옛 친구인 것 같은 40대의 아동 심리학자인 알릭스를 만납니다. 안느는 알릭스의 아파트에 얹혀지내면서 시몽이 빌려준 창고의 벽에 벽화를 그립니다. 그러는 동안 안느는 자신이 알릭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듀나 자서전적인 이야기임이 분명하죠. 레아 풀도 스위스에서 퀘벡으로 이민 온 캐나다인이니까요. 풀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25살에서부터 30살까지 겪었던 일들을 요약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군요.

이 사람 영화들을 보면 대충 이야기가 연결돼요.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성적 취향, 어머니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

파프리카 레아 풀의 영화를 보다보면 이 사람 엄마에게 꽥하고 고함을 질러주고 싶긴 해요. "이 아줌마야, 도대체 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이 영화에는 어머니 언급이 비교적 적게 나오지 않나요? 초반에 안느의 어머니가 "그애는 내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라고 후회조로 하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안느의 고뇌는 주로 죽은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잖아요.

듀나 아뇨! 정반대로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걸요. 어머니의 이야기가 그렇게 조금 나온 건 바로 그게 진짜 주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수수께끼의 정답인 거죠. 핵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숨겨야 할 어떤 것 말이에요. 뭐, 그렇게까지 복잡한 수수께끼도 아니지요. 거의 전면에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우선 알릭스와 안느를 보세요. 안느가 알릭스에게서 어머니의 대체물을 찾고 있다는 건 거의 분명해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여린 안느에 비해 알릭스는 진짜 어른이지요. 일단 연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훨씬 안정된 인물이니까요.

알릭스의 환자인 사라라는 여자아이도 또다른 분명한 힌트지요. 사라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어머니와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거의 분명하죠. 그리고...

사라와 알릭스

파프리카 그러고보니 그 장면이 생각나네요. 사라가 알릭스를 묶어놓고 "나쁜 엄마! 나쁜 엄마!"라고 외치는 부분요.

듀나 전 '저 나이에 벌써 본디지 롤플레잉을 하다니...'하고 생각했죠.

하여간 이 영화에서 사라는 안느의 도플갱어입니다. 일단 사라의 치유 과정은 안느의 성장 과정과 거의 속도를 같이 하잖아요. 종종 비슷한 행동이 안느와 사라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라가 숨은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곰인형을 학대하는 것처럼, 알릭스에게 거절당한 안느도 자기가 공들여 그린 벽화를 일부러 망치려고 하잖아요.

안느와 사라는 두 장면인가에서 만나는데, 그들의 관계는 꽤 재미있어요. 안느는 사라에게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사라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 또는 현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사라는 안느에 대해 거의 모르면서도 보자마자 심한 질투심을 느끼는데, 그건 안느가 자신의 경쟁자라는 걸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영악한 것 같으니.

파프리카 알릭스에 대한 안느와 사라의 애정이 중간의 한 점에서 수렴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간대에서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해요. 알릭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 시점에서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동시에 고찰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 영화가 자서전적이라면 사라 역시 레아 풀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이 영화가 꼭 시간 여행물 같군요.

이 영화에 정신분석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는 사실도 언급해야겠지요? 하긴 주인공 중 한 명이 심리학자이고 그 사람 직업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만 봐도 분명하지만요.

이건 좀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건 이런 식의 영화들이 동성애를 대부분 과도기적인 단계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프로이트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고 그 뒤로 정신분석학의 내부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의견이 상당히 다양해졌지만, 이 영화에서 알릭스에 대한 안느의 사랑이 사라의 본디지 롤플레잉처럼 일종의 치유과정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이 과정을 통해 안느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성숙한 어른이 되지요. 후반에 안느가 알릭스를 떠나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당연해요.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또다른 종류의 치유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문학적인 교양을 쌓은 20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툭하면 그러는 것처럼 레아 풀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의 대중적 지식을 이용한 것이 아니겠어요?

듀나 내용이 어떻건, 의식적인 정신분석 요소 도입은 꼭 장점이라고 할 수 없어요. 우선 사라의 이야기는 거의 교과서적일 정도로 도식적이고 기계적이기까지 한 걸요.

게다가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 때문에 영화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상징을 남발하게 되기도 하죠. 하긴 이게 레아 풀 영화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지만요. 영화에 따라 좋을 때도 있지만 종종 갑갑하기도 해요. 왜 사랑이 그냥 사랑일 수 없고 꼭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해요?

[안느 트리스테]가 성공적인 영화인 건, 이 작품이 상징을 남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걸 어느 정도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노골적인 정신분석의 요소들과 상징주의에도 불구하고 [안느 트리스테]는 암호풀이책이 아닙니다. 여기엔 분명한 이야기가 있고 충분히 분석가의 손아귀에서 피해갈 수 있는 인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가 존재해요.

가장 사람들이 많이 기억하는 것은 안느의 벽화입니다. 안느는 시몽이 빌려준 창고를 스튜디오로 꾸미면서 가상의 공간으로 확장된 벽들과 떠다니는 의자들로 가득 찬 벽화를 그리지요. 우린 헐어빠진 낡은 창고가 안느의 손에 의해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됩니다. 이 과정은 특별한 의미를 투영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재미있어요. 물론 우린 안느의 그림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그림과 창작 과정이 그 하나의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지요.

알릭스와 안느

안느와 알릭스의 이야기도 꼭 상징적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어요. 수줍고 서툰 몸짓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자체의 추진력이 있는 분명한 러브 스토리거든요. 단순한 치유 과정 이상이란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은 알릭스의 입장을 잊고 있는 듯 해요. 알릭스 역시 남자 친구를 버리고 안느를 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행동이 분명한 로맨틱한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것 말이죠. 그건 자기 감정에 책임을 지는 성인 여성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었어요.

파프리카 하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느릿하지요? 정말 수줍기도 하고요.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데저트 하츠]와 비교해보면 그 강도차가 더욱 분명해지지요.

듀나 둘은 전혀 다른 영화니까요. [데저트 하츠]의 두 주인공들 중 한 명인 케이는 처음부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동성애자였지요. 속도가 빨라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안느 트리스테]에서 안느와 알릭스는 모두 그 순간까지 이성애자로 살아왔지요. 느릿느릿하고 서툰 건 당연해요. 그게 더 사실적이지요.

그런 설정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안느의 선택은 용감해요. 몬트리올에 온 피에르에게 알릭스에 대한 자기 감정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안느는 마치 용감한 작은 토스터 같아요. "나는 알릭스를 사랑해. 알릭스는 아마 끝까지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난 그래도 끝까지 가볼 거야." 이 순간부터 늘 버림받고 방치되어 있던 겁많은 어린 소녀가 드디어 자기 인생의 키를 잡는 거죠.

파프리카 다시 상징주의로 돌아가게 되네요.

듀나 그렇군요. 빌어먹을.

파프리카 피에르와 안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제 생각엔 이들의 관계는 어느 정도 근친상간적인 것 같아요. 정말로 남매 사이라는 말은 아니고, 단지 레아 풀의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매간의 감정과 피에르와 안느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꽤 유사하다는 말이지요.

아까 안느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얼렁뚱땅 어머니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그런 식으로 아버지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우린 여기서도 레아 풀의 반자서전 회상을 통해 접근이 가능합니다. 안느의 아버지는 폴란드인 유태인으로 어쩔 수 없는 망명객이지요. 안느는 자기 아버지를 열 가지 나라 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으로 기억하잖아요. 그건 풀의 아버지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일 수도 있지만 레아 풀 영화의 중요한 성격 중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해요. 아버지의 존재가 레아 풀의 인생에 끼친 그 불확실성은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의 통로를 통해 흘러오다 발전하면서 '남성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하거나 망명한 여성'이라는 고유의 주제를 형성하게 되니까요.

이 영화가 [자유를 향해]나 [대답해 줘]보다 아버지에게 관대한 건 그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 이 영화를 만들 때 풀의 아버지는 딸의 기억 속에서도 어느 정도 죽어있었다고 해도 될 거예요. 살아있을 때는 극단적인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 추상적인 상징으로 줄어버렸으니.

듀나 사막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죠. 알릭스가 자신이 사막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안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안느는 알릭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지요. 영화 끝에 안느는 아버지가 묻혀 있는 이스라엘의 사막으로 가서 그곳의 모래와 거기서 자기를 찍은 영화 필름을 소포로 알릭스에게 보냅니다.

이 장면은 두 가지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말하고 있어요. 일단 우린 여기서 안느가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른 하나는 안느가 알릭스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여기서 알릭스가 사막에서 느꼈던 감정은 자신이 안전한 현대 도시에서 쌓아놓은 안정된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해요. 남몰래 알릭스는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을 느끼고 있었고 그건 안느와의 사랑을 통해 터져 나오지요. 안느에 대한 감정이 분명해지자 알릭스가 가장 처음 한 행동은 남자 친구 토마에 의해 거의 완성되었던 가족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막은 그들에게 일종의 지향점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망명객들이 묻혀있는 이스라엘의 묘지는 안느와 알릭스와 같은 정신적 망명객에겐 마음의 고국인 셈이지요. 그렇게 보면 안느가 알릭스를 떠난 것도 오히려 해피 엔딩일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식의 망명의 과정을 연출하는 안느의 행동은 오히려 안느와 알릭스만이 공유하는 세계를 더 단단하게 합니다.

파프리카 아, 전 사람이 단순해서 그런지 키스로 끝나는 해피 엔딩이 더 좋아요.

듀나 저도 그래요. 그들이 거쳐온 여정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끝내는 건 낭비예요.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열려있으니까 맘대로 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지요.

다시 보면서 느낀 것. 드문 일인데, 안느를 연기한 알빈느 길르나 사라를 연기한 루시 로리에는 모두 제가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요. 특히 전 안느를 아랍 소년과 같은 중성적이고 건조한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다시 봐도 여전히 그런 느낌이 드는 외모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슬픈 강아지 눈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죠. 아마 텔레비전에서 봤을 때는 많은 부분이 잘려나가서 그랬을 거예요. 이 영화에서 누드신들은 성적인 묘사보다는 주인공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강조하는데 더 효과적으로 쓰였지요. 하여간 안느가 침대에 누워 알릭스를 빤히 쳐다보는 두번째 키스신의 도입부에서는 그 80년대식 헤어스타일을 손으로 막 망쳐놓고 싶었다니까요.

파프리카 맞아, 이 영화는 정말로 80년대식이었어요.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이 그런 건 시대 배경이 원래 그러니까 그렇다고 쳐도 음악까지 그렇게까지 80년대식이었는지는 몰랐어요.

듀나 다니엘르 메시아의 노래 [De la main gauche]도 르네 뒤페레의 음악 속에 섞여 다시 들으니까 훨씬 멜로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여전히 그 음악에 대한 향수는 강하게 남아 있고 그 가사가 주는 울림도 크지만요. (03/04/21)

D&P

기타등등

드디어 필름으로 보나했는데... 영화제에서 상영한 건 베타 테입이었답니다. :-(